토요 시론

거수기(擧手機)는 사전적 의미로 ‘손을 드는 기계’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늘 찬성만 한다는 뜻에서는 ‘예스 맨(yes man)’이라고도 하고 ‘형식적인 투표’라는 의미에서는 ‘고무 도장’이란 말과 함께 쓰는 ‘러버 스탬프(rubber stamp)’라고도 불린다.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 아무 의견도 내세우지 않고 있다가 남이 시키는 대로 손을 드는 사람이나 기관·단체 등을 빗대어 쓰는 말이 바로 ‘거수기’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당 또는 양당 독식 구도로 이뤄진 의회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을 꼬집어 말할 때 쓰인다

타율성·비민주성...민주적 공론장 해치는 ‘거수기’

지방의회 상징 마크(사진=전북도의회 제공)
지방의회 상징 마크(사진=전북도의회 제공)

그런데 이 거수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뭐든 좋다, 다들 하는 대로 하겠다’ 식의 양시론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반대하지만 반대할 실권이 없어 따라서 하는’ 경우가 있다. 두 가지의 경우는 자율성과 타율성, 민주성과 비민주성의 차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해치는 가장 큰 거수기의 취약점은 바로 후자의 경우다. 본인은 반대하지만 실권이 없어서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찬성하는 거수기 역할이야 말로 의회민주주의를 해치는 주범이다. 특히 소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다수 의결만을 중시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따라서 독재로 빠지지 않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의회여야 한다. 숙의 과정이 공정하고 정의롭게 이뤄지는 민주적 공론장에서 거수기란 절대 허용될 수도 용납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선거나 의사 결정을 반드시 비밀투표를 하도록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거수기의 폐단을 막기 위함이다.

비민주적 거수기가 가장 극성을 부렸던 시기는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단일 후보를 대의원들이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거수기 흑역사는 그러나 뿌리를 내려 아직도 우리 사회에 기생하고 있다. 일당 또는 양당 독점 구도의 국회에서는 비일비재하고 지방의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잦다. 정치·행정은 물론 민간분야에서도 이러한 거수기 폐해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파행으로 끝난 후 책임 공방을 벌이며 정쟁과 삭발·단식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새만금잼버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부는 사전에 154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위원회(조직위)를 꾸렸으나, 정작 이들이 참여하는 대면 회의는 단 한 차례도 개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조직위원들은 잼버리의 주요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위원총회’ 때마다 제대로 된 토론이나 숙의 없이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사실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야 밝혀졌다.

새만금잼버리 조직위 154명 대면 회의 없이 거수기 역할만...파행·실패 예고

새만금잼버리 개영식이 열렸던 야영장 전경
새만금잼버리 개영식이 열렸던 야영장 전경

새만금잼버리 조직위는 공동위원장 5명과 각 부처 차관 등 당연직 26명, 청년·청소년 단체와 공기업·기업·직능 단체, 전북지역단체, 스카우트 관계자 등 유관 기관·단체 출신 위촉직 128명 등 모두 154명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위원총회를 소집하고 안건을 부의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상 위원장에게만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조직위원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거의 대부분 서면이나 이메일 등으로 대체되면서 위원들은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찬반 표시만 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그러니 제대로 된 준비가 이뤄질리 만무했다. 조직만 컸을 뿐 사실상 모두 모여 문제점을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니 파행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파행과 실패에 대한 책임 규명이 모호하고 막막할 뿐이다. 새만금잼버리 실패 예고는 이미 전북도의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새만금잼버리가 열리기 9개월 전인 지난 2022년 11월 21일 강태창 전북도의원은 프레잼버리가 개최 14일을 앞두고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취소된 배경에 대해 “폭우로 인해 잼버리 예정지가 물바다가 되고 진흙투성이로 변해 사실상 야영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취소된 것”이라며 “이는 상·하수도 같은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들에선 이미 1년 전부터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했었다. 

그러면서 강 의원은 "이제라도 전북도가 대회의 성공 개최를 위해 준비에 만전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새만금잼버리를 치적으로 내세우며 오직 성공적으로 이끌 자신이 있는 것처럼 호도해 온 민주당 출신 직전 도지사와 현 지사, 대부분 민주당으로 채워진 도의원들은 한목소리로 '성공 개최'에 방점을 찍으며 자신했다.

일당 독식 구도에서 비롯됐다. 민선 7기에 이어 민선 8기에도 전북도의회를 비롯한 전북지역 시·군의회는 물론 지방의회가 감시·견제해야 할 도·시·군 등 집행부 수장들도 민주당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전체 당선인 237명 중 205명(86.4%)이 민주당 소속이었다.

김관영 도지사를 비롯해 전북도의회 전체 40석 중 37명, 도내 14개 기초단체장 중 11곳, 기초의원 비례 포함 197명 중 168명이 같은 당 소속이다. 국민의힘 4명, 정의당 2명, 진보당 2명, 무소속은 24명에 불과하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이 오랜만에 비례 당선인을 배출하면서 과거보다 다양해졌지만 비율로 따지면 절대 미미한 수준이다.

지방의회-집행부, 일당 독식 구조...견제·감시 대신 눈치보기 ‘급급’

전북 전주시의회 의정활동 자료사진.
전주시의회 의정활동 자료사진(전주시의회 제공)

이러다 보니 의장, 부의장은 물론 각 상임위원장까지 민주당이 독차지하고 특별위원회 위원장 역시 민주당 몫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회가 견제와 감시 역할을 기대하기란 ‘우물가에서 슝늉 찾기’와도 같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방의회가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지역 유권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광역·기초단체장은 지역의 권리당원을 장악하고 지방의원 공천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지방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선 지방의회의 '거수기 전락'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의장단, 상임위원장 등 원구성에서 소수 정당을 배려해 건전한 비판 역량을 갖출 수 있는 정치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선거 때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 진다.

오죽하면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회 의원들의 경우 정당 공천제를 배제해자는 여론이 비등한데도 중앙당은 듣는 체도 하지 않는다. 하부 조직의 든든한 기반을 송두리째 내어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방의회가 제대로 된 견제와 감시, 그리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점 정당을 제외한 소수 정당들이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상임위 배분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지만 견고한 일당 독식 구도에선 언감생심이다.

개발 관련 의결, 시의원 34명 중 1명만 반대...‘의회민주주의 실종’

권한이 강화된 만큼 지방의회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특정당 일색으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가 독주 체제를 구축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지방의회 일당 독점 체제에서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거수기 역할 때문이다. 민선 8기 들어 전북도의회 인사청문회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듯이 부적합한 인사가 도 산하 기관장 후보자로 선정되더라도 통과의례와 같은 요식 절차에 그칠 뿐이다.

전주시의 경우도 민선 8기 우범기 시장 체제 이후 각종 난개발 정책과 불통 행정으로 불편과 불만의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시민을 대표해 집행부를 견제·감시해야 할 시의회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보다 전주시가 하자는 대로 밀어주는 일방통행 기구로 전락한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로 전주종합경기장 개발과 관련해 많은 논란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주시의회는 21일 열린 '제404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전주시가 제출한 '종합경기장 이전 및 복합단지 개발사업 변경계획 동의안'을 전체 출석의원 34명 중 찬성 30표, 반대 1표, 기권 3표로 가결시켰다. 34명의 시의원들 중 반대 의견을 제시한 의원이 단 한 명 뿐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민들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의회민주주의 실종'이란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다양성 확보’, ‘시민대의기구’ 거듭날 수 있는 선거법 개정 시급

전북도의회 전경
전북도의회 전경

지방의원들의 비위·일탈 행위가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체 윤리위원회 등의 징계 수준도 솜방망이에 그쳐 '제 식구 감싸기'란 비판을 받아온지 오래다. 지방의회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신이 팽배하다. 지방의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는 커녕, 의원 자질, 도덕성, 전문성 결여 등으로 폐지론도 끊이질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의회의 권한과 책임이 강화됐음에도 지방의원이 집행부의 ‘거수기’, 단체장과 국회의원의 ‘수족’이란 말이 쉽게 나온다. 따라서 숙의 민주주의를 해치는 거수기란 오명을 떨구기 위해서는 우선 집행부에 대한 제대로 된 감시·견제 기능부터 공고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쟁과 감시가 없는 의회 운영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아울러 지방의원의 선출 제도를 전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일당 독식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다양성 확보’와 제대로 된 ‘시민대의기구’로 거듭날 수 있는 선거법과 관련법 개정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물에 대한 검증 없는 선거 구도를 바꾸지 않으면 ‘거수기 지방의회’란 오명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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