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광주의 정율성 공원 건립 비난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보수단체들은 광주에서의 대대적인 항의 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총공세다. 

이들은 표면적으론 6·25 남침에 중공군의 일원으로 가담한 정율성은 ‘반(反)대한민국’ 인사이기 때문에 그를 기려서는 안 되고, 따라서 광주의 정율성 공원 건립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론 정율성 공원은 호남 광주의 ‘친북좌파’ 정체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투철한 ‘이념 전사’들의 주장에는 심각한 자기모순이 존재함을 우리는 금세 알 수 있다. 6·25 남침에 중공군의 일원으로 가담한 정율성이 ‘반대한민국’ 인사라면, 혈서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해 만주 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본토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에서 총칼로 독립운동을 토벌했던 박정희는 무엇인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의 잣대에 비춰본다면 친(親)대한민국 인사인가, 반대한민국 인사인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또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그 새를 못 참고’ 남로당에 가입해 공산 간첩 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까지 언도받았다. 이것은 친대한민국 행위인가, 반대한민국 행위인가? 극동의 자유주의 최우방이었던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 공산당과 수교한 노태우 정부의 외교는 친대한민국인가 반대한민국인가?

보수 세력이 반공이라는 이념적 잣대에 입각해 정율성 기념 공원 건립에 반대할 수는 있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중공군 소속의 음악가로서 6.25 당시 선무활동에 종사했던 정율성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대한민국 인사가 되는 기준에 의한다면, 일제 땐 일본군 장교로 만주의 항일투쟁에 대적하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대한민국의 파괴를 기도하는 간첩행위를 했던 박정희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여적범죄자이자 내란범죄자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자유중국’을 버리고 당시나 지금이나 6·25를 자랑스러운 ‘항미원조’의 반제투쟁으로 기리고 있는 남침 당사자 중공과 수교한 노태우는 신의를 저버리고 국적과 손을 잡은 기회주의 매국노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에서 정율성 공원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면, 국립묘지에 떡하니 자리 잡은 박정희의 묘지도 당연히 철거함이 마땅하다.

물론 이런 주장 앞에서 자칭 반공 투사들은 지금까지의 엄격한 잣대를 갑자기 버리고 온갖 구실을 내세우며 박정희를 옹호하고, 노태우의 ‘북방외교’를 칭송할 것이다. 정율성은 음악가로서 중공의 선무공작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용납불가능한 반대한민국 분자가 되지만, 박정희는 일본군 전투 장교로 항일투쟁의 중심지였던 만주 일대를 누볐어도 독립 운동가를 상대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으므로 반민족행위의 혐의를 둘 수 없다고 두둔할 것이다.

정율성에 대해서는 의열단 활동이 반대한민국의 죄악을 불식할 수 없다며 선을 긋지만, 박정희에 대해서는 6·25 참전이 남로당 활동의 과오를 깨끗이 씻은 참회의 행보라며 면죄부를 발급할 것이다. 노태우의 중공 수교는 동구권 붕괴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을 넓히고 경제 영토를 개척하여 새로운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외교적 쾌거이므로 ‘구시대적 이념의 잣대’로 이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며 옹호할 것이다.

우리 한 번 솔직히 생각해보자.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중 잣대를 휘두르는 한국의 자칭 보수 세력이 정말로 투철한 이념에 기반을 둔 집단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력은 반공이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는 이념이 아니다. 박정희로부터 비롯된 특정 지역 중심의 패권적 기득권이다. 이들은 이념집단이 아닌 지역 패권 집단이다! 그래서 반역적이고 노골적인 친북친중 행위도 특정 지역 출신인 박정희와 노태우가 하면 너그러운 잣대로 이해해줘야 하는 청년기의 사상적 일탈과 과감한 외교정책이 되지만, 현대적 잣대로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입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뤄진 호남 출신 인사의 중공 가담은 엄히 처단해야 하는 치명적 오점이 되는 것이다.

호남에 대해서는 일체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이념전사’가 되지만, 특정 지역에 대해서는 모든 예외를 무한히 인정하는, 좌우를 초월한 총체적 시야의 ‘민족주의자’요 ‘실용주의자’가 되는 것이 이들의 본색이다. 이들이 자기 고향의 친북 인사를 기리고 숭모하는 행태를 보면 좌파도 이런 좌파, 민족주의도 이런 민족주의가 없다. 이들이 중공 참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로 대한민국에 대적했던 북한 수뇌부 인사 김원봉과,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했던 친북인사 윤이상을 어떻게 기리는지 영남지역 기사들을 일별해 보길 바란다.

출처: 연합뉴스 2010년 3월 9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연합뉴스 2010년 3월 9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KBS 뉴스 2020년 9월 15일 보도.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KBS 뉴스 2020년 9월 15일 보도. 홈페이지 갈무리

특히 6·25 당시 북한군을 위해 군량미를 마련하고 간첩 남파 공작을 총괄했던, 보수세력의 잣대에 따르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한 반대한민국의 수괴 김원봉을 기리는 밀양의 의열 기념관에 대해 보훈부 장관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이 기념관은 김원봉이 아니라 의열단을 기리는 곳이라 괜찮단다! 의열 기념관은 영화 <암살>로 ‘밀양사람 김원봉’이 부각되자 밀양시가 김원봉 생가 터에 지은 시설이다. 당연히 김원봉 숭모가 콘텐츠의 핵심을 이룬다.

이걸 김원봉이 아니라 의열단을 기리는 곳이라며 정율성 공원과 구별하는 것은 그야말로 넋 나간 궤변이다. 호남 앞에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치 않는 매카시즘의 철퇴를 휘두르는 이념 전사들이, 특정 지역 앞에서는 갑자기 한민족 5000년 역사를 아우르는 장구하고도 총체적인 시야로 좌우 이념의 격변과 요철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함석헌과 문익환도 울고 갈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가장 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직접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출처: 노컷뉴스 2015년 8월 19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노컷뉴스 2015년 8월 19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이 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반공몰이에 열성인 박민식 현 보훈부 장관은 부산 지역구 의원이던 2015년 당시 중국 대외정책의 핵심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부산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은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던 시점이다. 자유주의 국제 규칙을 어기는 중국의 도발이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다는 서방의 진단이 쏟아지던 때다. 그 비상한 상황에서도 부산에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하며 중공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에 열심히 줄을 서던 이 ‘친중 실용주의자’가 호남 역사인물의 70년 전 행보에 대해서는 고리눈을 치켜뜨며 반공의 몽둥이 찜질을 하고 있다. 이 무슨 초현실적인 이율배반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공 이념전사들의 반응은? ‘외교 행위’니 괜찮단다.

출처: (위) 매일신문 2023년 8월 29일자 사설. 홈페이지 갈무리, (아래) 매일신문 2022년 11월 11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 (위) 매일신문 2023년 8월 29일자 사설. 홈페이지 갈무리, (아래) 매일신문 2022년 11월 11일 기사. 홈페이지 갈무리

뿐만 아니다. 대구의 최대 지역 신문인 매일신문은 뜬금없이 2023년 8월 29일자 사설로 정율성이 ‘대한민국 파괴자’라며 공원 건립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혔다. 대구 지방지가 타 지역 인사와 사업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난센스는 논외로 치자. 그런데 대구의 보수 정서를 가장 정확히 대변한다는 ‘가톨릭 대구대교구’ 운영 신문이 1946년의 ‘대구 10·1 사건’(보수진영에 의하면 ‘공산폭동’)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10월 항쟁이란다. ‘이념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되는 아픈 역사란다. 여기에 대한 반공 전사들의 반응은? 지역신문이 그러는 게 뭐가 잘못이란다. 

이게 바로 자칭 이념 전사들의 실체다. 이런 궤변과 이중 잣대로 점철된 게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요 이념전사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보수니 반공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과분한 포장이다. 이들은 그저 지역적 이해관계를 좇아 떡고물이 담긴 밥그릇 위를 부유하는 날벌레들과 무엇이 다를까. 1997년 15대 대선 정국 당시 총풍 사건이 드라마틱하게 말해주듯 이들은 자기 고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면 중국이 아니라 북한과도 얼마든지 손을 잡고 외환유치(外患誘致)와 여적의 초대형 범죄를 저지른다.

자칭 보수 세력이 느닷없는 ‘호남 때리기’에 나선 이유는 다른 게 없다. 특정 지역의 호남 혐오 정서를 자극해 내부 결속을 다져 내년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나치독일이 패전 후 좌절과 분노에 빠진 독일 국민을 결집하는 심리적 재료로 반유태주의를 활용한 것처럼 말이다. 정율성이니 친북이니 친중이니 하는 것들은 호남을 때리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이렇게 겉으론 철지난 반공몰이로 사람들의 시야를 호도하고 이들이 이면에서 벌인 실질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새만금잼버리 파행을 빌미로 전북 새만금 SOC에 투입될 국가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대한민국에 이념은 없다. 이념의 포장을 벗기면 오로지 지역 패권의 속살만 드러날 뿐이다.

/투고자: 윤중대(네티즌, 2016년 20대 총선 당시 <프레시안> ‘4·13 호남의 선택’ 논쟁 참여)

※<전북의소리> 공론장은 외부의 글(주장이나 제언 등)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