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7세기 이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건설했다. 그리고는 자유와 평등을 무기 삼아서 중세의 봉건적 관념을 물리쳤다. 종래의 기득권층에게 특권을 보장했던 정치사회제도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 결과로 사회가 변하는 듯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객관적으로 말해, 중세가 끝나고 변화된 세상에서 자유를 얻은 것은 부르주아지뿐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큰 폭으로 증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나, 분배는 공정해지지 않았다. 세상은 평등해지지 않았다. 사회적 모순도 해결이란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워졌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엉클어졌다. 그런 동안에도 공장의 설비는 꾸준히 확장되어, 19세기 초에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공황 현상이란 것으로, 공업국가의 대도시에서 대량실업이 발생했다.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자 노동자를 포함한 영국의 하층민은 선거권의 확대를 요구했다. 역사에서 차티스트 운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다.
'내로남불'이란 값싼 표현마저 무색하게 만든 부패한 현실
1838년부터 약 20년 동안 영국의 하층민은 조직적인 정치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의회의 개혁도 요구했고,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도, 무기명 투표의 시행까지도 촉구했다. 또, 의원에게도 보수를 지급해야 정치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민중의 청원운동이 활발하였다. 그때 퍼거스 오코너가 이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는 아일랜드의 젠트리 출신으로 하원의원이기도 했다. 협동조합운동의 창시자 로버트 오언도 청원운동의 지도자였다. 차티스트 운동은 또 다른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했다는 말이다.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지의 횡포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1848년의 2월 혁명이요, 1871년의 파리코뮌이었다. 이것은 오래 누적된 하층민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가장 첨예한 반응을 보인 것은 독일 사회였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한 목소리로 근대 시민사회를 거세게 비판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근대가 아니라, 중세사회야 말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뜻한’ 중세사회를 재건하자는 것, 이러한 회고적 감정이 독일 낭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이때부터 독일 지식인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취향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1770~1831)은 그 정점에 올랐다. 헤겔의 『법철학』을 알 것이다. 이 책에서 헤겔은 가족, 시민사회 및 국가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성찰을 상세히 기술했다. 한 마디로,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를 호되게 비판했다. 근대 시민사회란 개인의 사적 이익을 마음껏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진단했다. 결과적으로 근대 사회에는 빈곤층이 다수 출현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하여 세상은 더욱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도덕적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내다 보았다.
나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며 헤겔이 옳았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총체적 난국이다. 이 부패한 나라 꼴을 보라. 역대 대통령이라는 자들의 면면을 보시라. 특히 보수정권이 내놓은 대통령이란 사람들은 칼을 든 강도와 무엇이 얼마나 달랐던가. 흔해 빠진 말이지만, 다들 '내로남불'이란 값싼 표현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따뜻한 중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녹색주의'는 사실상 그와 같은 중세적 낭만주의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근대 독일의 철학적 흐름을 살펴보면, 천만뜻밖에도 그들의 사고 방식이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과 비슷했다. 그들은 조선의 선비들만큼이나 고전사회를 동경하고 이상화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도덕적 기능에 기대를 걸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했다. 국가를 도덕적 이상의 정화(精華)로 바라본 것도 어쩜 그렇게 일치하였던가.
해가 기울기 전에 '제3의 길' 찾아내야 할 것
물론 두 나라의 지식인 집단은 큰 차이점도 있었다. 독일의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을 높이 평가했고, 산업과 교역도 중시했다. 또, 근대의 문화유산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그런 경향이 거의 없었다. 선비들은 지나치게 농업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산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문명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더욱더 중요한 차이도 있었다. 독일의 사상계는 비판적 사유를 중시하였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에 카를 마르크스(1818~1883) 같은 인물이 출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볼 개념적 도구를 창안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파헤쳤다. 그의 새로운 사상은 유럽 사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것도 결국에는 근대 시민사회의 부조리를 청산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적어도 한 세기 동안 근대의 문제를 점검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비판의 힘이 박약하였다. 그들 대다수는 전통을 묵수(默守)하다가 모든 기회를 다 잃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도, 나는 그것이 혹시 표면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한다.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비판의 힘이다. 우리는 '따뜻한' 중세로 되돌아 갈 수도 없고,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묵묵히 지키려 애쓸 일이 아니다. 해가 기울기 전에 제3의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