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작은 나라라도 제 하기에 따라서는 큰 나라를 요리할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에도 당연히 그러한 예가 있었다.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고려 귀족사회의 아웃사이더 이성계(李成桂, 1335-1408, 태조, 재위 1392-1398)를 조선(1392-1910)의 시조로 탈바꿈시킨 책사 중의 책사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바로 그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요동 진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외이(外夷) 중에서 중원을 평정한 영웅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한 것이다.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할 때만 해도 이성계 휘하 세력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며 애써 명분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명나라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 조선을 압박하자 정도전은 요동 정벌론을 펼쳤다. 

강대국을 요리하기는커녕 휘둘리는 경우가 역사상에 더욱 '빈번' 

이성계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명(對明) 전쟁이 과연 정도전의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주장의 저변을 흐르는 강인함과 사고의 유연성은 높이 평가해줄 만하다. 신생왕조 조선을 길들이려던 명나라 조정에서는 정도전을 괘씸히 여겼다. 저들은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사건’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명나라에 보내온 외교문서의 자구(字句)를 트집 잡아 조선의 대신 정도전을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 측은 정도전의 소환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태조는 요리조리 핑계만 댔고, 당사자인 정도전 역시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요동 정벌을 별렀다.

요동정벌을 구실로 정도전은 공신과 왕자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했다. 이것은 초창기의 불안한 왕권을 강화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또한 군사들을 대규모로 출동시켜 진법(陣法)을 훈련하기도 했다. 천하의 명나라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 감히 어쩌지 못했다. 저쪽에서 제법 강하게 나온다 해도, 이쪽이 움츠려들지 않고 응수한 효과가 있었다. 애석한 일은 사병 혁파를 계기로 정안대군 이방원(李芳遠, 1367-1422, 태종, 재위 1400-1418)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을 죽인 것이다. 멀리 있는 강대국을 요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가까운 정적을 처치하는 데는 정도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강대국을 요리하기는커녕 휘둘리는 경우가 역사상에는 더욱 빈번했다. 19세기 말엽, 임오군란(1882년) 때도 그랬다. 개화냐 위정척사(衛正斥邪)냐를 둘러싸고 국내의 정치세력이 양분되어 있었다. 국왕 고종은 개화를 바랐고, 그래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일련의 개화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본다면 당시 조선의 지도층 가운데는 위정척사파가 훨씬 많았다. 구식군대는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했고, 그래서 사소한 이유를 구실 삼아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임오군란인데 그로 인해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집권층은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그들은 참으로 해괴한 해법을 내놓았다. 국내의 정적을 짓밟기 위해 저들은 중국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이래로 내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의 군대를 데려온 적은 아직 없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희한한 해결책을 발동한 고종과 그 측근세력은 이후에도 외국 군대를 빌려 내부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1884년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도 그런 것이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일본은 자국의 낭인(浪人)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침략해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를 시해하는 참극을 저지르게 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국왕은 외세를 빌려 명맥을 보존하려고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1896년). 근 1년 동안이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무대로 내정을 지휘하였다. 나라꼴이 어떠했을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세계 10위권 강대국, 제 몸 하나 균형 잡지 못한다면 말이 되기나 하는가 

외국 군대에 정권의 운명을 맡긴 셈이라, 저들은 반대급부를 요구하며 많은 이권을 빼앗아갔다. 중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좀 더 상권(商權)을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서울에 진주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사실상의 조선총독처럼 굴며 십년 넘게 우리나라의 국정을 주물렀다. 서양 중세의 부자 나라 베네치아도 결국 외세의 간섭으로 망했다. 조선도 이러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일본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한반도에서 저마다 이권을 차지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것이 결국에는 조선의 망국으로까지 이어졌다(1910년).

외세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 노릇인지를 모를 한국인은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우리 정부는 한-미 동맹에만 목을 매다시피 한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구제불능이 되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인 중국과의 우호와 친선도 사라졌다. 이명박 정권 때도 이처럼 바보같은 사태가 연출되었다. 그때도 뜻있는 시민들은 정부의 외교 관행이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쏟아냈지만, 윤석열 정권은 과거의 잘못을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재현하고 있다.

어느 정치가가 말했듯, 한반도는 4강으로 둘러싸인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우리에게 중국과 일본은 문화를 공유하는 운명적 동반자다. 또, 러시아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파트너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이 나아길 길은 명명백백하다. 우리는자주와 평화의 토대 위에서 균형 잡힌 외교와 통상 정책을 펼쳐야 한다. 지금 이 나라에 절실한 것은 미국과 일본에 온몸을 기대는 정책이 아니다. 우리는 실력과 협상을 통해 주변의 모든 강대국을 솜씨 있게 요리해야 하는데, 우리의 처지가 과거 100년 전처럼 '상갓집 개'처럼 그렇게 열악한 것도 아니다. 세계 10위권에 드는 강대국 대한민국이 제 몸 하나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이게 말이 되기나 하는가.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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