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돈은 정치의 젖줄이다.” 1977년에서 1987년까지 10년 넘게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팁 오닐(Tip O'Neill, 1912-1994)은 정치에서 돈의 중요성을 그렇게 간결한 한마디로 정리했다. 물론 이 점에선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없다. 오랫동안 혁신주의 운동을 해온 민주당원이자 전 연방방송위원이었던 니콜라스 존슨(Nicholas Johnson, 1934-)은 “양당을 집어 삼키고 있는 기업의 부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민주당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특히 1990년대의 사회 분위기는 1920년대의 황금만능주의를 재현한 듯 보였으며, 이는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 1946-)의 성공의 7가지 영적인 법칙(The Seven Spiritual Laws of Success)(1994), 폴 제인 필저(Paul Zane Pilzer, 1954-)의 신은 당신이 부유하기를 원한다(God Wants You To Be Rich)(1995) 등과 같은 베스트셀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났다.
민주주의와 금권의 힘
그런 상황에서 정치는 거의 공공연하게 값으로 흥정되는 시장터로 바뀌기 시작했다. 금권의 정치통제력이 증대되면서 ‘대통령 매수하기(Buying the Presidency)’와 ‘의회 매수하기(Buying of Congress)’ 등과 같은 새로운 연구와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90년대를 결산하듯 언론인 엘리자베스 드루(Elizabeth Drew, 1935-)는 1999년 미국정치의 부패(The Corruption of American Politics)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2000년 대선을 전후로 부패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한탄이 쏟아졌다. 부와 기업의 정치지배는 직접적이고 기소 가능한 ‘경성’ 부패와 뇌물이 베일을 쓰고 법과 규제가 의심스러운 목적으로 왜곡되는 ‘연성’ 부패를 통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1세기 전 기업의 상원 지배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2000년 이전까지의 대통령 선거자금 모금을 “부의 예선(Wealth primary)”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거액 기부자의 후원이라는 새로운 선거 요소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예비선거 자체를 ‘국가적 경매(national auction)’라고 조롱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정치권의 내부 비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민주당 정치인 빌 브래들리(Bill Bradley, 1943-)는 [뉴욕타임스](1996년 9월 8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돈은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 돈은 누가 당선되는가뿐만 아니라, 누가 출마하는가도 종종 결정한다. 만일 당신이 훌륭한 아이디어와 1만 달러를 가지고 있고 내가 형편없는 아이디어와 100만 달러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나의 형편없는 아이디어를 훌륭한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 수 있다.”
200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브래들리는 “19세기 후반이나 지금처럼 정치가 돈의 인질이 되면 국민들이 고통을 받는다”며 이런 말도 했다. “경제적 기회나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꿈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 모든 미국인 가정이 경제적 기회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를 금권의 힘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1940-)도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 시절이던 2002년 PBS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참여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敵)중의 하나는 특별이익집단이 퍼부어대는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미치는 영향력이다”고 했다.
돈의 특혜
미국에선 정당이건 정치인이건 대선자금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건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실질 달러 가치로 환산한 대선 비용은 네 배 이상 증가하여 20억 달러를 훌쭉 넘어섰다. 2012년 의회 의석 하나를 얻는 데 드는 비용이 상원은 1050만 달러, 하원은 보통 170만 달러로, 상하원 모두 1986년보다 선거 비용이 두 배 정도 늘어났다.
보수 논객 피터 스와이저(Peter Schweizer)는 [정치는 어떻게 속이는가: 갈취당하는 데 신물난 시대를 해부한다](2013)에서 “현대 미국의 정치는 정책으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돈과 특혜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수익사업이자 산업이 되었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워싱턴에서 행해지는 정치는 프로레슬링과 매우 유사하다. 순진한 눈에는 아주 지독한 혈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정교하게 짜인 연기일 뿐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 정치에도 프로레슬링과 유사한 점이 없진 않겠지만, “돈과 특혜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수익사업이자 산업”이 되었다고 말하긴 망서려진다. 물론 한국에서도 돈이 정치의 영원한 젖줄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