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기자, 온몸으로 묻는다] MBC ‘ PD수첩’ 임다솔 PD
지난 3월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 이후 후폭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미래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제 동원에 대한 해법으로 제3자 변제 안을 제시했다. 이후 일본은 화답하듯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후 일본 언론은 정상회담 때 독도와 위안부 합의 문제가 거론됐다고 보도했지만, 대통령실은 부인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난 4일 MBC <PD수첩>에서는 ‘한일회담과 청구서’ 편이 방송되었다. 이날 방송에서는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 살펴보고 정상회담 이후 일본에서 날아온 청구서를 짚어보았다. 취재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5일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한일회담과 청구서’ 편을 연출한 임다솔 PD와 만났다. 다음은 임 PD와 나눈 일문일답 정리했다.
“취재 전, 쭈르륵 계속 터지니까 이걸 어떻게 담아내야 될지 고민 많이 했다”
- 지난 4일 방송된 MBC <PD수첩> ‘한일회담과 청구서’ 편 연출 하셨잖아요. 방송 끝낸 소회가 어때요?
“이번 회차에 일본 출장도 갔었고 회담 이후로 사건이 이슈가 계속 터지고, 인터뷰한 사람도 많았어요. 심지어 취재 기간에 코로나에 걸렸었어요. 그래서 스탭들과 엄청 우당탕 취재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끝나서 시원섭섭합니다.”
- 해외 취재는 처음인 거로 아는데 어땠나요?
“솔직히 처음에는 약간 해외 현지에서 윤석열 대통령 일정도 볼 수 있고 현지 반응도 궁금해서 되게 신났는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웃음). 대통령 일정에 맞춰서 같이 가다 보니까 도로 통제가 있어서 차가 너무 막히는 바람에 인터뷰 시간을 맞추느라 거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코디분 따라서 휴게소에서 때우며 다니기도 했어요.”
-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취재는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가 있었고 그다음에 3월 6일 강제 동원 제3자 변제 안이 발표됐고, 피해자들이 반대하는 상황이 있었죠. 이번 회차 작가님이 이전에 강제 동원 문제를 <PD수첩>에서 다룬 적 있으셨었어요. 그래서 강제 동원 해법안에 대한 내용으로 한번 취재해보겠느냐고 시작했는데 정상회담 발표가 났어요. 그래서 이 흐름을 따라가야겠다고 하고 갔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회담의 후폭풍이 또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에 따라 터지는 대로 저희도 팔로우하면서 취재하다 보니 이렇게 취재라인을 잡아가며 만들었습니다.”
- 계속 일이 터지니 계속 팔로우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특히 회담 이후에 위안부 문제라든가 독도 문제, 오염수 방류 등 진실 공방이 이어졌고, 3월 29일에 터졌던 교과서 문제까지 있었죠. 사실 하나하나 보면 다 개별 회차 주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게 쭈르륵 계속 터지니까 이걸 어떻게 담아내야 될지 고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 그러면 PD님은 한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나요?
“사실 일본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일본 영화나 콘텐츠면 몰라도 정치 상황이나 이런 거에 대해서는 더욱 잘 몰랐죠. 아베 총리 시절일 때 아베 총리 좀 알았고 지금 이제 기시다 총리 이름 아는 정도죠.”
"일본 정치인, 오히려 한국의 역사 교육이 반일 교육이라고 주장”

-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나 봐요?
“길거리 다니면서 물어보는데 일반 국민들에게는 확실히 관심도가 떨어지는 게 정말 많이 느껴졌어요. 실제 몇몇 인터뷰도 방송에 나왔는데, 방송 안 나온 인터뷰 중 ‘윤 대통령이 한국에 온 거 아느냐’고 했는데 모르는 분도 계셨어요. 온 걸 알더라도 ‘왜 왔는지 아냐’ 물으면 ‘잘 모른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왔겠죠?’란 대답도 있었고. 한국 대통령이 온 거 모른다는 분에게는 한국 대통령 이름을 물었는데 뭔지 모르는 분도 계시기도 했고요. 전반적으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이 많고, 정치에 관심이 있더라도 자세한 내용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요.”
- 우리는 많이 아나요?
“물론 한국에도 자세히 모르는 분들 계셨겠지만 방송에서 큰 이슈로 다뤄졌잖아요. 일단 관심도도 높았고요. 제3자 변제 안이 발표되고 나서 학생들이라든가 교수님들이라든가 시민단체에서 전국 곳곳에서 시위도 있었잖아요. 반발하는 것도 컸고 온도가 다른 느낌이죠.”
- 1965년 한일 협정이 쟁점인 것 같아요, 일본 측은 한일 협정으로 끝났다는 거고 우리 대법원판결은 별개라는 것 같은데.
“맞아요.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었는데 일본은 청구권 ‘개인 청구권은 없다. 우리는 돈을 줬다. 그때 끝났다’고 주장을 하고 있어요. 저희가 간단하게 방송에서 설명하긴 했지만 사실 국제법상이나 이후 여러 가지 조약, 흐름을 봤을 때 일본에서도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어요. 실제로 일본의 고노 발언이나 일본의 여러 문서에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발언과 문건이 있어요. 그리고 그걸 받아들여서 한국에서도 인정하는 거고요.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다는 거죠. 그 내용을 명시하고 판결 내린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매우 중요해지는 거죠.”
- 세계적으로 개인 청구권이 인정되나 봐요?
“네, 그리고 일본 국민 역시 미국에 개인 청구권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었어요. 그러면서 일본에서도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게 된 거고, 방송에서도 나왔지만 일본 변호사도 국제법적으로 인정된다고 설명하고 있죠. 그래서 피해 당사자분들이 일본에도 소송하고 한국에도 걸 수 있었던 거죠.”
- 식민지의 불법성을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가 쟁점 같아요.
“한국 대법원판결에서는 불법적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있는데요. 일본은 아베 정권이 특히 8년 동안 있으면서 식민 지배는 정당했다고 굉장히 크게 주장하고 있죠. 그래서 방송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교과서라든가 이런 데서도 그렇고 일본인 정치인들도 그렇고 그런 방향으로 항상 말을 하고 있어요.”
- 일본 정치인도 만나셨던데
“네. 그리고 한 정치인은 방송에 안 나간 부분이 있는데 자기가 ‘군함도에 가봤다, 시설이 너무 좋았다, 강제 동원이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오히려 한국의 역사 교육이 반일 교육이라고도 하기도 했고요.”
- 일본 정치인들은 진짜 그렇게 생각 아닌 걸까요. 아니면 알지만 왜곡해서 말할까요?
“저희가 안 그래도 그 질문을 일본 외무성 출신 평론가분에게 물어봤어요. 물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기가 강제 동원이 있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일본에서 정치인은 정치적으로 그렇게 말 할 수 없다는 거예요. 특히 일본에서 정치하고 인기를 얻으려면 강제 동원이 있었다는 말 할 수 없는 거죠.”
“제3자 변제안, 피해자 당사자들이 받지 않겠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것...사실 불가능한 문제”

- 극우 집단의 집회도 있는 거 같던데 분위기가 어땠나요?
“회담이 있었던 총리 관저 바로 앞에서 시위하고 있었고, 저희가 일본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 그런 극우 차량들이 많았어요. 차량 같은 경우 스피커를 켜고 지나다녀요. 분위기는 일반적인 시위 분위기였는데 팻말들에 적힌 내용이나 인터뷰를 해보려고 물어보면 항상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든가 ’위안부는 거짓이다‘라는 발언들을 계속하시죠. 오히려 대화하면 분위기가 과격하고 이런 건 아니었어요.”
-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정부나 기업에 구상권 행사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이에 대해 나중에 정권 교체되어 바로 잡으려 할 때 우리가 말 바꿨단 지적 받게 했다는 주장도 있던데.
“정권 바뀌어서 정부가 구상권 행사했을 때 ’안 한다더니 왜 하냐‘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죠. 그리고 본인이 안 한다는 거 뭐라고 할 순 없죠, 근데 무한한 게 아니잖아요. ’내 임기 동안엔 구상권 청구 안 하겠다‘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사실 제3자 변제안은 피해자 당사자들이 받지 않겠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도 사실 불가능한 거죠.”
- 정상회담 때 기시다 후미호 일본 총리는 ‘구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표현했잖아요. 이게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용어인데 윤석열 대통령은 문제 제기 안 한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저희가 인터뷰하는 교수님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런 단어가 강제 동원을 인정 안 하는 뜻이라는 걸 저는 몰랐거든요. 그리고 그 구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게 강제 동원을 부정하기 위해서 아베 전 총리가 거의 만들어낸 고안한 용어라는 것도 몰랐고요. 근데 외교를 한다고 했을 때는 이런 디테일한 용어라든가 이 사람들이 쓰는 입장이라든가 이런 거를 잘 알고 해석했어야 되는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이 좀 아쉬운 것 같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인 김성주 할머니 만나셨잖아요. 어떠셨어요?
“2015년 <PD수첩> 강제 동원 촬영분을 보고 갔어요. 나이가 드시기도 했겠지만,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이 몸이 안 좋아지신 게 눈에 보여서 그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찾아갔다는 사실 자체도 마음이 안 좋았죠. 그리고 지금 성주 할머니가 95살인데 15살 때의 그 기억을 생생하게 하시는 거예요. 중간중간 일본어를 뱉으신다거나. 그래서 좀 충격을 많이 받았죠. ”
“한일 회담 후폭풍으로 일본으로부터 계속 청구서 날아오는 것 같다는 느낌 받아”
-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얻은 게 수출규제 해제인 것 같은데 과연 우리에게 좋을까 하는 의문이 방송 보면서 들던데.
“수출 규제 해제해서 이득이 있을 것이니 양국의 관계가 좋아지면 좋은 거죠. 정부가 강조하던 부분이 수출 규제 해제했을 때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부분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실익이 있냐를 저희가 짚고 싶었던 거였어요. 반도체 업체들에 저희가 엄청 전화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수출 규제 당시 굉장히 많이 국산화했고 특히 기회를 얻었던 중소기업들 그리고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서 국산 하려고 했는데 그런 예산이나 정책의 도움을 받았던 기업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러면서 다시 살펴보니까 수출 규제라는 건 일본도 한국에 수출을 못 하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매출이 굉장히 많이 떨어졌고요. 그러면 이 해제가 한국에만 이득이 된 게 아니라 일본 기업에도 되게 이득이 될 수 있겠죠.”
- 제목이 ‘한일회담과 청구서’잖아요. 왜 이렇게 했어요
“저희가 제목을 이렇게 한 이유는 한일 회담 후폭풍으로 어쨌든 일본으로부터 계속 청구서가 날아오는 것 같다는 느낌 받아서 그렇게 제목을 정했어요. 일본 언론을 통해서 많은 요구나 요청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줬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 여러 전문가분을 만났을 때 이게 우리가 지렛대를 잃어서라고 해주셨기 때문에 청구서라고 정했습니다. 물밑에서 많은 조율이 있었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축사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봤을 땐 한미일 공조를 위해서 했구나 등등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는 거 같아요.”
- 미국에 대한 얘기는 거의 안 나오더라고요, 취재를 안 하신 건가요?
“미국 얘기도 저희가 좀 넣어볼까 했는데 너무 복잡해져서 그건 덜어냈어요. 바이든 대통령의 축사 정도는 넣었던 이유는 그래도 그 언급은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한미일 이제 실무진들이 1년에 40번 만났대요. 지금 그게 지난 5년간 만난 횟수보다 많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좀 유추할 수 있는 바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조사하고 알아봐야 하나 했는데 강제 동원과 한일 회담을 메인을 두고 하다 보니까 이 내용을 덜어내게 됐습니다.”
- 아쉬웠던 게 정부나 국민의힘 의원 인터뷰가 없더라고요.
“맞아요. 저희가 대통령실에 질문지를 보내긴 했는데 답을 못 받았어요. 국민의힘 의원들은 저희가 방송에도 넣긴 했지만 언론에 적극적으로 정부의 성과를 홍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갈음 했습니다.”
- 취재하며 느낀 점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해외의 반응을 한국 언론들이 전해주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봤을 때 느낀 점들이 있었어요. 얼마나 관심이 있는 거지나 아니면 얼마나 관심이 없는 거지라고 생각했을 때 일본 편의점에 갔는데 언론 일간지 1면에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이 있고, 기자들이 몰려있는 풍경을 보며 언론 되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실제 숙소에서 제가 TV를 켜서 아침 방송을 보는데 WBC가 메인으로 나오고 그 아래 윤석열 대통령이 다뤄지는 걸 보고 어쨌든 1번 꼭지가 WBC고 윤석열 대통령이 다뤄지고 있었죠. 일본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고 하면서 직접 현장에 나가고 몸으로 확인하는 취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영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