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죽음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의 말이다. “나는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죽는 법을 배워왔다.” 이탈리아 예술가이자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치유되길 꺼린다. 죽음이 모든 질병의 치유책이기 때문에.” 영국 작가 토머스 브라운(Thomas Browne, 1605~1682)의 말이다. “태양과 죽음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프랑스 작가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의 말이다.
“자유인은 삶만을 명상한다.” 네덜란드 철학자 베네딕트 스피노자(Benedict Spinoza, 1632~1677)의 말이다. 그는 이 명제를 내세워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죽음에 대한 사색을 거부했다. “자유로운 사람은 전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만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선을 욕망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한다.”
죽음의 소비시장
“낙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말이다. 인류의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고 믿었던 그는 죽어갈 때도 정신상태가 몹시 고양되어 있었고, 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모든 삶의 목표는 죽음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정신병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말이다. “모든 탈출 수법 중에서 죽음이 가장 효율적이다.” 미국 작가 헨리 루이스 멩켄(Henry Louis Mencken, 1880~1956)의 말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보다도 남겨진 사람에게 더 날카로운 아픔을 남긴다.”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의 말이다. “작가가 죽으면 그의 작품의 중요성이 과장되는 것처럼, 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위상도 과대평가받게 된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의 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이란 별 아래에서 살아갈 뿐이다.”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 1914~1984)의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죽음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상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혈육의 죽음을 현세의 ‘인정 투쟁’을 위한 이벤트로 만들곤 한다. 장례식장들은 앞 다투어 ‘품위와 성실을 보증’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격 저렴’, ‘교통 원활’, ‘주차장 완비’ 등을 내세우는 광고를 해댄다. 이를 가리켜 아리에스는 “죽음이란 소비의 대상이다”고 했다.
“죽음은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갔다. 이제 죽음은 일상의 친숙한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충분히, 그리고 가까이서 죽음을 보지 못함으로써 죽음을 망각했다.” 아리에스가 '죽음의 역사'(1975)에서 한 말이다. 죽음의 ‘소비 시장’에 병원들이 뛰어들면서 벌어진 일이다. 오늘날 병원은 장례식장을 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리에스는 “죽음은 후퇴했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이 죽음을 “강탈당했다”고까지 말했다.
죽음과 장례문화
“이제 미국에서 죽음의 80퍼센트가 병원과 ‘양로원’에서 일어난다.” 미국 역사가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이 '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1990)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강탈당했다”는 아리에스의 말을 긍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족 대신 낯선 이들과 의료진에 둘러싸인 채 홀로 죽어간다. 사제는 의사로 대체되었고 의사는 죽어가는 자의 심리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방법을 수련하지 않으며 환자에게 그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숨긴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음으로 끌려들어간다. 어떤 최후의 현실에 노출되기는커녕 죽음이란 것이 마치 체온을 기록한 도표에서 마지막 하강점에 불과한 것인 양 죽어간다.”
미국 정신의학자 앨런 프랜시스(Allen J. Frances, 1942-)는 "병원에서 죽는 것보다 나쁜 죽음은 없다"며 "주삿바늘이 쉴 새 없이 몸을 찌르고, 종일 시끄럽고, 밝은 불빛에 잠들 수도 없으며, 가족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외롭게 죽는다"고 했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어떨까? 죽음이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갔다는 점에선 서양과 비슷하지만, 서양인들이 보기엔 놀라운 점도 있나 보다. 아일랜드인으로 오산대 교수인 워렌 닐랜드(Warren Neiland)는 지난 2014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국을 좋아하지만 한국식으로 죽거나 묻히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환자 가족이 간이침대에서 새우잠 자며 간호하는 장면, 고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조문객이 북적대는 장면, 5만~10만원씩 현금을 헤아려 흰 봉투에 넣는 장면, 유족과 조문객이 고인과 아무 상관없는 얘기를 나누는 장면, '○○기관 대표 ○○○' 리본이 달린 조화(弔花)가 늘어선 장면….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풍경이 그의 눈엔 기이하게 비쳤다고 한다.
닐랜드는 특히 화장장에 갔을 땐 여러 유족이 한 공간에 뒤섞여 각자 번호표 받고 북적대는 광경에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고인을 보내는 건 굉장히 개인적인(private) 경험인데, 그곳 풍경은 꼭 패스트푸드 식당 같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일랜드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애도하고 존경을 바치는데 여기선…. 내 인생에서 가장 서글픈 공간이었어요. 복지가 부실한 측면도 있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전북의 소리가 이일님의 반론을 기사화한 까닭은 명분이 있어서였다.
호남 민심을 대변하려면 호남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는 명분.
그런데 강 전 교수는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이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호남의 대변자를 참칭하나?
당신이 하달한 메시지를 호남 시민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르기만 바라나?
그렇다면 호남을 대변하려는 게 아니라 호남 위에 군림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목포출신 호남 시민의 자격으로 강 전 교수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쓴다고 다 글이 아니다. 이의제기를 감당하지 못할 주제라면 차라리 논하지 말라.
당신의 정치적 목적에 순순히 이용될 호남 시민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