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강진읍의 시장 내에 있는 '대통령밥상'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자 어떤 사람이 기타를 치며 앉아있다. 혹시 낯익은 사람인가 하고 바라보자 젊은 시절의 가수 지망생 삼촌이었다. 조건진 아나운서와 삼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으면서 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얼굴까지 감싸고 아래만 바라보면서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전라도 말로 '해찰'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걷는 때가 많다.

얼마 전 처음 참석해서 함께 걸었던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노래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레퍼토리'가 참 다양한 것 같아요.”라고 했다. 이틀 만에 나를 파악하다니, 사람들이 나더러 노래를 참 많이 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모르면 몰라도 수백 곡에서 1,000여 곡은 알 것이다. 그 옛날의 '뽕짝'에서부터 김광석의 노래와 박정현의 노래까지. 

어떤 사람들은 나더러 기억력이 좋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재라고도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막내 삼촌이 가수 지망생이라 매일 노래만 불렀고, 나는 좋든 싫든 그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몰라도 그렇게 해서 그 노래들의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있게 내 머릿속에 각인 된 것이다.

가수 지망생이던 삼촌의 우상이 ‘빨간 구두 아가씨‘ 를 부른 저음 가수인 남일해씨와 ’영등포의 밤‘을 부른 가수 오기택 씨였다. 그리고 잘 부른 노래가 ’사랑이 메아리 칠 때‘를 부른 안다성 씨였다. 그들만 좋아한 게 아니었다. '샹송'을 즐겨 부르던 최양숙 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제목은 잊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나의 머리는 희어지고“라는 노래 가사는 깊은 애조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샹송이나 팝송의 레코드판을 제법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삼촌이 그 중 자주 듣는 노래가 프랑스의 샹송 가수인 '사르르 아즈나부르'였고 그의 노래 중에 ’이자벨‘을 너무나 좋아했다. 아직 어렸던 내가 프랑스어인 그 노래의 내용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대략 짐작만으로 ‘그 남자는 사랑을 했었고, 그러다 실연을 당했을 것이다. 실연을 당한 그 남자가, ’이자벨, 이자벨, 이자벨‘ 하면서 울분과 절망을 저렇게 온몸으로 토해내고 있을 것이다. 

어린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면 궁벽한 시골에서 꿈을 꾸면서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삼촌의 심사는 얼마나 타 들어 갔을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을 전개시키며 듣다 보면 가슴이 막 답답해서 감정이 미칠 듯 고조되는 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 시간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얘야? 저 남자는 왜 이 잡아, 이 잡아 하면서 맨 날 이만 잡는 다냐?” 

지금도 가끔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나는 가수 지망생이었던 삼촌이 가수들에게 보낸 글을 본 적이 없다. 인기 연예인들에게 보낸 팬레터의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삼촌은 어떤 내용의 글을 남일해 씨나 오기택 씨, 안다성 씨 같은 가수들에게 보냈을까?

삼촌이 보낸 편지의 정성을 이해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요즘의 세태처럼 대필 해서 보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자필로 가끔 답신을 보내주곤 했다. 그들의 편지를 받은 날은 삼촌은 말 그대로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이 보였다.

그 편지로 인해서 삼촌은 꺼져 가던 가수에 대한 꿈을 다시금 이어가기도 했다. 나는 삼촌의 편지를 해병대 시절 할머니에게 보낸 몇 편의 편지 글 이외에 본 적이 없다.

몇 년 간 함께 보낸 삼촌의 일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가수가 될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매일 입에서 노래가 떠나질 않았다. 통키타도 수준급이었고, 하모니카를 유난히 잘 불었던 삼촌이 언제 그 꿈을 접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가수 지망생이던 삼촌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노래가 어림잡아 1,000곡은 될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고, 내가 많은 노래를 알고는 있으면서도 대중가요, 특히 뽕짝은 질색을 하고 잘 부르지 않았다. 남진 씨, 나훈아 씨, 하춘화 씨 등 뽕짝 가수를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나는 한사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도 송창식 씨나 양희은 씨, 이연실 씨를 좋아했었다. 그렇게 내가 그런 노래들을 거부했던 것은 저마다 다른 유전 인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 이 도시 저 도시의 구석진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지망생들을 바라보면 빙긋이 웃으며 삼촌의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 노래 어떠냐?”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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