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나는 당신을 그토록 사랑해요/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냐고요/나는 그들에게 모른다고 말해요/나는 그들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얼마나 내 인생이 외로웠는지/그러나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어요/당신이 내 손을 잡은 그 날부터요.” 돈 매크린(Don McLean, 1945-)의 1970년 히트곡 <And I Love You So>다.

“내가 당신이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나는 의자에서 거의 굴러 떨어질 뻔 했어요/당신이 말하려고 당신의 입을 움직였을 때/나는 온몸의 피가 발끝까지 가는 것을 느꼈어요.” 로보(Lobo; Roland Kent LaVoie, 1943-)의 1972년 히트곡 <I'd Love You to Want Me(나는 당신이 나를 원하길 바래요)>다.

이 두 곡의 노래 가사가 보여주듯이, 1970년대 팝송엔 낭만적 사랑의 노래가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주었다니, 이게 마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에게든 순간이나마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처음 잡은 순간 이 세상이 내 것 같고 마음 먹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을 영속시킬 수는 없는 걸까? 

사랑의 근본적 열쇠 

결코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의 환멸, 그건 사랑의 낭만 못지 않게 엄존하는 현실이다. 이별의 고통과 배신의 상처도 노래해야 한다. 한국에선 10여 년 전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노래들이 우리 귓전을 때리곤 했다는 걸 기억하실 게다.

“백일을 겨우 넘긴 너인데 숟가락만 들어도 자꾸 니 생각에 눈물이 나“(린의 ‘곰인형’, 2012) “더 멋진 남잘 만나 꼭 보여줄게 너보다 행복한 나”(에일리의 ‘보여줄게’, 2012) “날 버린 그 대가로 행복하지 말아요“(주니엘의 ‘나쁜 사람’, 2012) “지우개로 널 지울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모두 지우고 싶어“(알리의 ‘지우개’, 2013)

사랑의 신비나 낭만성 예찬에 인색하거니와 사랑의 과장법에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은 사랑을 자꾸 ‘개인’에서 ‘공동체’로 끌고 가려고 한다. 예컨대, 이탈리아의 좌파 운동가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는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사랑은 남녀 한 쌍이나 가족 속에 가두어지는 그 무엇일 수 없다. 그것은 더 넓은 공동체를 향해 열리는 그 무엇이어야만 한다”며 “나는, 사랑은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근본적 열쇠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그가 지적 동료인 미국 철학자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60-)와 더불어 제시한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사랑(love as a political concept)’이다. 이들은 “사랑의 근대적 개념은 부르주아적 커플에, 그리고 핵가족의 밀실 공포증적 울타리에 거의 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랑은 엄격하게 사적인 일로 여겨져 왔다. 우리에겐 사랑에 대한 더 넓고 더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그것은 단지 당신의 사랑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이 공통적인 우리의 정치적 기획들과 새로운 사회의 구축을 위한 기초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과 증오와 고통 

아주 좋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 작가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의 말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인류를 사랑하는 게 더 쉬운 일이다”는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는 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위선의 대향연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한계와 속성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동체를 향해 열린 사랑에선 당신은 내가 쉬는 모든 숨이며 나의 세계라고 외치는 과장법의 극치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점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 윌리엄 콩그리브(William Congreve, 1670-1729)는 “사랑이 변해서 생긴 증오처럼 맹렬한 것은 하늘 아래 없다”고 했고, 오스트리아 정신병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사랑할 때처럼 고통에 무방비인 때는 없다”고 했다.그럼에도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며, 따라서 이 단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마도 레비나스의 말을 따를 사람들이 더 많을 게다. 사랑의 유혹은 당장 눈앞에 있는 반면 사랑으로 인한 증오와 고통은 피할 수도 있는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일 게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단지 미래를 염려해 사랑이 주는 마법의 순간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요즘엔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래된 미신으로 여겨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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