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중국 북송 때는 재상들도 셋집에 살았습니다. 현직 재상의 자제들에게는 과거 응시조차 금지하였고요. 인사부정을 막기 위해서였다지요. 

낙하산 인사, 검찰 선후배가 끌고 미는 인사가 상식처럼 되어버린 지금 세상에서는 이해가 안갑니다. 대통령 부부는 장안의 손꼽하는 부부요, 검사라면 아는 사람이 많아서 뇌물도 많이 받는 것이 기본이고, 판사를 잘 알아야 재판도 이긴다는 말이 법조계 인사의 자식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이라니까요. 우리는 청렴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살고 있는가 봅니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북송 때 사정을 자세히 기술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어요.

“재상의 유능한 자제들이 등용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나, 천하의 허다한 인재를 썩히는 것보다는 잘한 일이었다.” 

실학자 정약용 역시 고위층의 절제와 청빈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강진의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지요.

“무릇 선비는 관직에 등용되는 즉시 높은 언덕에 셋집을 마련해 처사(處士)처럼 검박하게 살아야 한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청빈한 선비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이산해는 그 표본이었다지요. 그는 평생 벼슬에 종사했지만, 집 한칸 밭 한뙈기도 없었습니다. 손님이 집으로 찾아오면 방이 비좁아서요, 자신은 말 잔등에 깔던 언치에 나가 앉을 정도로 궁색하게 살았어요. 그래도 늘 태연자약했습니다. 인물평에 유난히 까다롭던 율곡 이이도, 오직 이산해에 대해서는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선조에게 이산해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 적이 있었지요.

“이산해가 이조판서를 맡자 모든 청탁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연려실기술>)

셋집만 전전하다 칠순에 접어든 이산해였어요. 그는 서울 장통방의 셋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나, 가난에 대한 회한은 없었습니다. 백사 이항복도 참으로 청렴하였어요.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지만 셋집살이를 했습니다. 남인의 영수로 우의정을 지낸 허목도 구리개의 셋집에서 살았습니다. 제 13대조이신 좌부승지 백유함도 개성의 셋집에서 타계하셨다고 합니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대대로 세습되던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청빈한 선비들이 많았습니다. 가난을 자랑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새는 해도 너무한 것 같습니다. 웬만한 인사는 모두 수백 억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요. 월급을 모아서 번 돈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새 사람이 등용될 때마다 인사청문회가 열리지만요.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하는 장관이 거의 한 사람도 없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세상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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