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증오만큼 끈질기고 보편적인 정신력은 없다.” 미국의 목사이자 노예폐지운동가였던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의 말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냉소를 넘어설 수 있는 증오의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짜르 정권이 레닌의 형제들을 살해했지만 그것이 레닌을 냉소주의자로 바꿔 놓진 못했다. 오히려 증오가 일생에 걸쳐 활동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보다 안정된 서구의 국가들에는 증오를 불러일으킬 만한 강력한 원인이나 대단한 복수의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증오에 고집스럽게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일단 증오가 사라지면 어쩔 수 없이 고통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1924~1987)의 말이다.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증오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이 단지 다른 사람의 집단쯤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적은 사악해야 하며 우리의 안녕에 위협이 되어야 한다. 적을 다룰 때에는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정당화할 어떤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적은 악마나 악의 대리자가 되며, 일반 사람을 대하듯이 해서는 안 되는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 정신분석학자 윌러드 게일린(Willard Gaylin, 1925~)이 [증오: 테러리스트의 탄생](2003)에서 한 말이다.

“증오하는 자에게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 점의 회의도 있어선 안 된다. 그 앞에서 의심하는 자는 증오할 수 없다. 회의한다면 그렇게 이성을 잃을 리 없다. 증오에는 절대적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어쩌면’은 걸리적거리면 방해만 한다. 모든 ‘혹시’는 증오 속으로 침투해 어딘가로 분출했어야 할 그 힘이 새나가게 한다.” 독일 작가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 1967~)가 [혐오사회: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2016)에서 한 말이다.

“조직에서 나오기 전에는 매일 아침 눈을 뗄 때마다 누가 나쁜 놈인지 알았다. 지금은 그런 확실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는다.” 청소년 시절 6년 동안 독일 튀링겐의 네오나치 집단에서 활동했던 반(反)극우 운동가 크리스티안 바이스게르버(Christian Weissgerber)의 말이다. 이와 관련,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Laura Wiesböck, 1987~)는 [내 안의 차별주의자: 보통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20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이스게르버의 말은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함과 명확한 방향을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아주 적확하게 짚는다. 고정관념이 그러하듯 적개심도 방향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제하거나 제거하려는 태도를 정당화해 때로 파괴적 잠재력까지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커뮤니티 조직가이자 작가인 샐리 콘(Sally Kohn, 1977~)은 [왜 반대편을 증오하는가: 인간은 왜 질투하고 혐오하는가](2018)에서 “서로 다른 집단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집단적인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에 증오를 선동하는 북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분노와 두려움에 기름을 붓는 수많은 문제들의 진짜 원인과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조직적인 요인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보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악마처럼 묘사하는 게 훨씬 더 쉬운 일이긴 하다”고 말했다.

증오와 사랑

샐리 콘과 윌러드 게일린이 잘 지적했듯이, 증오의 선동과 유지엔 악마가 필요한 법이다. 진짜 악마를 만들어낼 순 없으니 ‘악마화’라고 하는 ‘증오 마케팅’이 기승을 부린다. 진보 정치가 노회찬(1956~2018)은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2014)에서 진보진영의 ‘증오 마케팅’을 ‘진보가 극복해야 할 자기 한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증오와 분노에는 분명한 근거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증오시스템으로, 증오프레임으로 설명해버리면 상대가 가진 장점을 볼 수 없게 된다. 왜 국민들이 저들에게 표를 주는지 납득도,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이 바보라서 속아 넘어갔다’, ‘국민들 의식이 낮다’, 이런 식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따라 할 게 있는데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한다.”

‘증오 마케팅’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이성적 호소는 무력하다. 차라리 감성적으로 접근하자.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Sophocles, 497~406 BC)의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말이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흑인인권운동가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은 “누군가를 증오하는 건 내 영혼이 편협해지고 타락하는 길이다.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어둠은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다. 빛만이 그럴 수 있다. 증오는 증오를 쫓아내지 못한다. 사랑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증오의 선동과 유지엔 악마가 필요하다는 사실 하나만 명심해도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공감을 앞세워 자신이 저지르는 악마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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