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질투도 하나의 세상 풍경이다. 살다가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고, 나를 제대로 알기는커녕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내가 무수한 험담을 듣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칭찬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옛 사람들의 말을 익히 알면서도 일종의 험담인지 질투인지 모를 남의 말에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미인은 남에게 양보하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비록 약간 누그러질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질투를 완전히 치료하기는 어렵다. 심한 경우에는 바람과 그림자에도 화를 내고 궁사(弓蛇)에도 질투를 일으켜 죽기를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죽으려 한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에 실린 글이다. 미인이나 특출난 사람만 그럴까? 묘한 것은 질투라는 감정이 여자만의 전유물 만도 아니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그의 <수필집>에서 “질투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해서 발생하며 비교가 없는 그곳에는 질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때에 상대방에게 질투를 하게 되는 것일까?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계까지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좋게 받아들이지만, 그 한계를 넘으면 사람들은 질투를 하고 의혹의 손길을 보낸다”고 질투를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능력이나 여건으로 가능한데 까지는 인정하지만 자기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다가설 수 없다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이다. 재능과 의지가 결핍되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은 질투가 발생한다.” 

힐티의 말이다. 이미 2000년 전에 “누구나 자기와 같은 수준의 사람보다는 앞서가기를 원한다”고 갈파한 리비우스의 말도 맞다. 알만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질투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보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기형도의 시 구절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경쟁심과 질투는 같은 기술, 같은 재능,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지은 라브뤼엘의 말을 위안 삼아 질투도 하나의 세상의 풍경이거니 하고 사는 것도 사는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깊은 슬픔을 지닌 인간은 행복한 기분일 때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것은 질투 때문에 행복을 교살하고 질식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행복을 부둥켜안는 버릇이 있다. 아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머지않아 그것이 도망치리라는 것을.”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 실린 글이다. 언제쯤 극단적인 그러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면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모르고 또 모르는 게 사람의 마음 속 풍경이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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