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고인의 인격과 비밀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호해야 합니다. 고인의 인격을 침해하거나 비밀을 노출하는 보도는 고인과 유가족의 법적 권익을 해칠 수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와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 등이 지난 2013년 9월 10일 제정한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많은 조항들을 담고 있다. 그 중 일부 내용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국내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윤리강령 기준으로 삼아온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사 제목에 ‘자살’이나 자살을 의미하는 표현 대신 ‘사망’, ‘숨지다’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둘째, 구체적인 자살 방법, 도구,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는다.
셋째, 자살과 관련된 사진이나 동영상은 모방자살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유의해서 사용한다.
넷째, 자살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자살로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와 자살예방 정보를 제공한다.
다섯째,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에는 고인의 인격과 유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특히 유명인 자살보도를 할 때 이 기준은 더욱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자체 강령 또는 권고기준 일뿐, 강제조항이나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맹점이다. 스스로 준수할 것을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권고 또는 호소하는 조항이라는 점 때문에 일부 언론사와 언론인들, 개인 유튜버들은 오히려 이를 역 이용함으로써 주목을 끌어보려는 시도와 사례가 늘고 있다.
60년대식 먹레이킹 저널리즘, 한국서 횡행하는 이유?
특히 유명인의 자살보도를 할 때 더욱 엄격하게 기준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번 고 박원순 서울시장 사례에서 보여주듯이 보수언론들과 보수성향의 유튜브 채널들이 보여준 고인에 대한 인격과 명예훼손, 심지어 조롱은 1960년대 미국 언론들 사이에서 유행하다 퇴조한 ‘먹레이킹 저널리즘(Muckraking Journalism)’의 부활을 연상케 할 정도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취재원의 인격은 신경 쓰지 않고 쓰레기 더미를 갈퀴로 파헤치듯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먹레이킹 저널리즘'이 우리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 추구와는 거리가 먼 '흠집내기' 또는 '손봐주기', '꼬투리잡기'식 의제설정의 전형을 말한다.
특히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과 관련 고인을 모욕하는 방송을 진행하고,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인근에서도 생방송을 진행해 주말과 휴일 내내 논란과 공분을 일으켰다.
강용석 변호사와 연예기자 출신 김용호, 방송기자 출신 김세의 등은 지난 10일 고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 인근을 찾아가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들은 고인의 사망 추정 장소로 알려진 서울 와룡공원에서 숙정문 일대를 걸어 다니며 고인을 비웃으며 조롱을 이어가는 장면을 유튜브로 생중계함으로써 비난을 자초했다. 고인과 유족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과 인격을 침해한 사례로, 추후 법적처리 등 또 다른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주류언론들의 오보와 추측성 보도, 보도준칙에 어긋나는 영상보도 경쟁도 줄을 이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수색하고 옮기는 현장을 전달한 방송사들 중 일부 언론사들은 가이드라인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미디어오늘>은 “유튜브와 다시보기 영상 등에 따르면 KBS와 채널A 등의 매체가 박 시장 시신이 들것에 옮겨지는 모습을 클로즈업 샷으로 흐림 처리해 내보냈다”고 지적했다.
자살보도 가이드라인 역이용하는 보수언론들
더구나 10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가 고인이 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신발견 관련 소식을 기자들과 일부 유튜버에게 브리핑하면서 나온 질문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사인을 좀 더 조사하셔야 되겠지만 목을 맨 건가요, 떨어진 건가요?”
“성곽 높이는 어떻게 되나요?”
“발견 당시 상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외모가 심하게 손상됐나요? 아니 그걸 분명히 이야기해주세요. 외모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자살 흔적이 있었나요?” ...
오죽했으면 경찰 관계자는 “고인과 유족 명예를 고려해 확인해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답했으나 자살보도 준칙을 위반한 질문은 계속됐다.
이 외에도 보수신문사들은 자사 홈페이지에 계열 종편방송사들이 내보낸 자극적인 내용의 사진과 영상들을 경쟁적으로, 속보성으로 올려놓으며 주말 내내 인터넷 중계하다시피 했다.
한국영상기자협회의 ‘영상보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자살자의 시신을 촬영하면 안 된다. 따라서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를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적시돼 있다. 자살보도준칙에도 ‘사진이나 영상 장면 방송을 피해야 한다’고 정해놓고 있지만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보도 줄을 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색에 나선 가운데, 일부 언론들이 성급하게 ‘박 시장 사망 보도’를 내보내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됐다.
월간조선은 9일 오후 6시 45분경 “[속보] 박원순 시장 시신 발견, 성균관대 부근에서 발견”이라고 보도했다가 뒤 늦게 기사를 삭제했다.
그러자 이날 오후 7시께에는 “[단독] 박원순 서울시장, 성대후문 와룡공원 후문서 시신으로 발견”(투데이코리아), “[속보] 박원순 서울시장 시신 발견 ‘성균관대학교 후문 와룡공원...’”(충청리뷰), 15분여 뒤 “박원순 추정 시신 발견..‘미투’ 의혹”(뉴스에듀신문) 등의 기사가 줄을 이었다.
의미 없는 오보 후 사과보도
다른 언론사의 '속보나 단독' 기사는 무조건 따라하거나 베껴 쓰고 보는 어뷰징(abusing) 습속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박 시장의 실종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수색 중일 때 “박 시장 시신이 발견됐다”고 오보를 낸 로톡뉴스는 10일 사과문을 통해 “지난 9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 상황에서 잘못된 보도를 했다. 시신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 ‘발견됐다’고 쓴 오보였다.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기사가 나간 후 사과는 별 의미가 없다.

오죽했으면 ‘고 박원순 시장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휴일 입장문을 내고 “유튜브 가세연이 사망 추정 장소에서 보여준 사자 명예훼손에 대해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고인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마구 퍼졌다. 악의적, 추측성 게시 글로 인해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유족들의 고통이 극심하다. 부디 이런 행위를 멈춰주길 거듭 간곡히 부탁한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도 보수언론과 보수성향의 유튜버들은 고인의 인격과 명예, 유족들의 사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훼손하며 갈퀴로 쓰레기를 파헤치듯 보도하며 준칙과 가이드라인에 반하는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먹레이킹 저널리즘의 부활을 보는듯하다. 쓰레기 언론들의 막장 경쟁에 다름 아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평안한 영면을 기원합니다.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