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기자, 온몸으로 묻는다]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박선정 아키비스트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가로 잘 알려진 고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신 등이 국가 지정기록물로 지정됐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는 지난 10일 문 목사의 옥중서신을 비롯한 소장 사료 3,100점이 국가기록원의 국가 지정기록물 제15호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마침 18일은 문익환 목사 소천 29주기이기도 해서 이번 국가 지정기록물 지정 의미와 함께 문익환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문 목사 딸인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그리고 박선정 아키비스트와 지난 13일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국가 지정기록물 지정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다”

- 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소장 사료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옥중서신 및 사진첩’ 3,100점이 민간 중요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기록물 제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
박선정 아키비스트(이하 박): “먼저 기쁘고 좋다는 감정적인 반응보다 드디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정 신청을 전임 아키비스트가 작년 1월 말에 했어요. 거의 1년 만에 지정 고시가 된 것인데요. 그동안 역사 및 기록 관련 전문가들이 현장 실사 오셔서 기록물 소개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기록물도 보여드리고 또 국가기록원 직원분들도 두 번 정도 오셔서 관리 환경하고 수량 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가셨어요. 그리고 연말에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지정 심의가 통과됐고 1월 6일에 드디어 지정된 건데요. 주위 선후배 아키비스트 분들과 다른 단체로부터 축하를 많이 받아서 격려도 되고 자부심도 생깁니다.”
- 국가 지정기록물 신청은 왜 하게 됐나요?
박: “옥중 편지나 사진첩 모두 희소성, 역사성, 정보성, 예술성을 두루 갖춘 기록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쭉 간직해 왔다고 생각해요. 이번 지정을 통해 공증된 셈이지요. 때문에 관리나 활용 측면에서 더 책임감을 갖게 돼요. 국가 지정기록물 신청은 오명진 아키비스트가 제안하고 실행한 것인데요. 그때 신청 이유가 ‘지정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다’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 말에 동감해요.”
- 왜요?
“아무리 지정서가 있다고 해도 기록이 보존 상자에만 잠자코 있으면 이용자들의 관심과 공감을 얻지 못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운영 중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기록이 이용자들에게 즐길 거리가 되게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국가 지정기록물이라는 것이 저희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에게도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그런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옥중서신 및 사진첩’ 3,100점엔 어떤 게 있나요?
박: “공식적인 기록물 건 지정 명칭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옥중서신 및 사진첩’라고 되어 있는데요. 옥중편지하고 사진 앨범으로 두 종류예요. 옥중서신은 또 두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먼저 수감자인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쓰신 745통의 편지가 있어요. 편지지와 봉투가 일체형인 봉함 엽서에 쓰였지요. 다른 하나는 아내 박용길 장로님이 감옥으로 보내신 편지가 2,304통이에요. 이렇게 편지의 수가 차이 나는 이유는 수감자는 편지를 보내는 횟수의 제한이 있었어요.
두 분의 편지는 특이한 게 편지 위에 제1신 제2신 등의 번호가 붙어 있는 것이에요. 두 분이 매기신 건데 그렇게 해서 검열관이 검열로 뺀 편지를 번호로 파악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또 검열관의 눈 피하고자 특정 인물이나 단체 그리고 지명은 은어를 사용하기도 했고요. 면회를 제외하고는 편지라는 수단이 바깥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편지 안에 시와 노랫말부터 학술적 토론, 안부나 요청 그리고 잔소리까지 있어요. 읽는 재미도 있습니다.”
- 사진첩도 있잖아요. 사진은 어떤 건가요?
박: “사진첩은 박용길 장로가 구성한 51권의 주제별 사진 앨범이에요. 주제는 크게 종교 관련,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가족사 등 3개로 나누어져요. 특히 ‘가족 역사’라는 제목의 앨범이 있는데요. 1920년대 문익환 일가의 북간도 시절 사진부터 있어서 약 100년 전의 기록이에요. 그리고 1994년 문익환 목사님 별세 이후에는 박용길 장로님이 본격적으로 통일 운동에 나서셨는데 2005년에 2006년도까지의 앨범이 주제별, 시기별로 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박: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시작이에요. 옥중서신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이기 때문에 두 편지를 연결하여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좀 편하게 읽으실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또 단지 편지 이미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또 얽힌 사연들을 이용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잘 풀어내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계획에 있습니다.”
“서울시의회에서 예산 증액안 부결한 것인데 왜 건립사업 자체를 취소했는지 믿을 수 없어”
- 서울시의회 행정 자치위원회는 지난해 12월 21일 공유재산 관리계획에 포함된 통일문화센터 사업비 증액 안건을 부결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적정한 사업비 확보가 어려워 정상적인 공사가 불가능해졌다"며 건립 취소를 결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이하 문): “통일문화관 설립 계획은 6년 전부터 시작했던 것이고요. 그동안 서울시에서 타당성 검사. 예산 확보. 부지 매입. 설계까지 다 마친 사업인데 갑자기 취소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요. 서울시의회에서는 예산 증액안을 부결한 것인데 왜 건립 사업 자체를 취소하였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서울시의 확실한 결정과 대책을 아직 들은 바가 없고 언론 보도만 들은 상태에서 지금 뭐라고 말씀드리는 거는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요. 사실 통일문화관 설립 계획은 서울시 사업이지만 통일의집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민간 통일 운동을 기념하고 통일 준비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서울시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에서 협력해서 준비한 사업이에요. 그래서 서울시장과 의회 구성원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사업이 폐기된다면 이분들은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 뭔가 의도가 있다고 보세요?
문: “그렇지 않으면 타당성을 문제 삼을 일은 없을 것 같고요. 그냥 예산 증액 안 해주면 될 것 같은데 사업 자체를 폐기하려고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서울시에서 매입한 필지 중에 한 집은 문익환 목사 큰아들 가족이 40년 넘게 살던 집인데 문화센터 건립 취지 공감해서 매각한 집이거든요. 민간에 끼친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모르겠고요. 지금이라도 이 사업이 다시 추진돼서 이루어지기를 저희는 간절히 바라고 있고요. 만약에 사업이 무산되더라도 그 집만은 원소유자에게 반환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6년 된 거잖아요. 그럼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가요?
문: “토지도 다 매입이 됐고 설계도 다 끝났고 삽 뜨는 일만 남았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취소된다는 게 납득이 안 가죠.”
- 통일의집 관장으로 계시잖아요. 통일의집에 대해 모르시는 분도 많을 것 같아요. 통일의집 소개를 부탁드려요.
문: “통일의집은 1970년부터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던 집이에요. 이 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면서 공부도 하시고 기도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많은 일을 하셨어요. 1994년 이 집 안방에서 문익환 목사님이 세상을 뜨셨어요. 그 후에 박용길 장로가 통일의집이라는 현판 붙이고 누구든지 찾아와서 통일을 논의하고 교육하는 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유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11년에 박용길 장로님 세상 떠나신 후 1년 동안 통일맞이 사무실로 사용할 때 통일맞이 일꾼이었던 김재규가 신청하여 2013년에 이 집이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그 후 가족들이 이 집의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라는 점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정 하고 2018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맞이하여 시민 모금으로 집을 1990년대 초 문 목사 살아계실 때 모습으로 복원하여 생신인 6월 1일 작은 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는 많은 유품과 편지들, 또 사진, 서예품, 미술 작품, 서적 등 각종 유물이 간직되어 있는데 장소가 좁아서 아직 여기다 다 전시할 수는 없어서 일부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수장고에 보관 중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오명진) 아키비스트가 시작 하여 온·온프라인 아카이브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유품도 전시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다 관람하실 수 있어요.”
- 통일의집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반응은 어때요?
문: “시민의 반응은 이 집에 오면 아늑하고 포근해서 좋다고 하고 하세요. 그리고 저희가 1990년대로 복원을 해놨기 때문에 바닥은 종이 장판이고요. 모든 집 구조도 전시 시설까지 다 직접 제작하신 거라 통일성도 있고 아늑하거든요. 그래서 오시면 다 좋아하셔요.”
문 목사 “감옥에 가지 않았으면 헛살았을 뻔하였다. 그곳에서 새로 태어났다”

- 18일이면 문익환 목사 29주기잖아요. 관장님이 기억하는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문: “문익환 목사는 상당히 예민하시고, 원칙주의자셨어요. 그런데 지금 많은 분이 기억하시는 문익환 목사님은 푸근하고 모든 사람을 품어 안는 분이라는 얘기 하시는데요. 성품이 바뀐 데는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천주교하고 같이 공동번역이 첫 번째예요. 성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벽을 깨는 경험을 하셨다고 말씀하셔요.”
- 벽을 깨는 경험이요?
문: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타 종교하고도 소통하고 사회하고도 벽을 허물어서 같이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사는 삶을 깨달으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셔요. 그러고는 감옥에 들어가셔서 민중과 억압받은 자들을 직접 만나셨고 그분들을 위해서 가슴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감옥에 가지 않았으면 헛살았을 뻔하였다. 그곳에서 새로 태어났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로서 문익환은 자식들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해 주셨어요. 그래서 조언과 방향 제시는 해주셨지만, 간섭과 강요는 하지 않으셨어요. 자식들이 방황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 심정을 헤아리고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답답했던 것은 왜 이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지 이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버지가 계셨으면 알려주셨을 것 같은 것들이 막상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안 계신다는 거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희 자식들이 느낀 건 우리만의 아버지가 아닌 큰 어른을 육신의 자식들이 잘 보살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컸어요. 근데 입관 예배 때 설교해 주신 목사님이 문 목사를 여기 묻는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심는다는 말씀이 큰 위로를 주었어요. 문 목사를 심으므로 많은 이들이 그 뜻을 이어갈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민족으로 살아온 동질성은 바다의 해류라면 남북의 지금 이질화는 파도와 같아”
- 아버지가 언제 생각나세요?
문: “그러니까 저희가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아버지가 계시면 우리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실 텐데 그런 게 많이 아쉽죠. 그리고 활기차게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던 분이 막상 안 계시니까 모든 게 좀 침체되는 것 같고 계셨으면 지금 활기차게 일들이 진행될 거라는 생각을 할 때 제일 아쉽죠.”
-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하셨잖아요. 2023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발전했지만, 남북통일은 요원해 보이는데 지금 대한민국을 문익환 목사께서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문: “문익환 목사가 항상 하시던 말씀 중에 역사를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역사를 사는 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미완의 역사는 있어도 실패한 역사는 없다고 하셨고 실패한 역사라고 생각되는 역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걸 완성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많은 비극이 분단으로부터 시작이 됐으니 그런 것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분단이 해소돼야 된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리고 남이 그어놓은 분단을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주도적으로 벗어나야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민족의 평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셨죠. 그래서 무력을 통한 통일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면 그 나머지 방법은 평화 통일밖에 없다고 생각하셨고요.
문익환 목사가 방북 후 처음 맞은 6.25 날 쓰신 시에 6.25에서 죽은 300만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씨를 말릴 더 무서운 핵전쟁을 나의 작은 두 손바닥으로 막으려고 갔던 거라고 그 만용을 하느님께 받아달라는 기도를 하셨어요. 수천 년 우리가 한민족으로 살아온 동질성은 바다의 해류라면 남북의 지금 이질화는 파도와 같다고 하셨어요. 문 목사가 아마 지금 계셨으면 옆에 있는 우리에게 기운 북돋아 주고 함께 역사를 살아가자고 통일 운동을 같이하자고 등을 두들기면서 이끌어 나가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영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