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사과는 과거엔 어리석거나 약한 자의 언어로 인식되었기에 해선 안될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분별력 있는 자는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영국 정치가이자 작가인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는 “사과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일 따름이다”고 했으며, “감정을 드러낸 것에 대해 사과하지 말라. 만약 사과한다면, 그건 진실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했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행정개혁가 벤저민 조윗(Benjamin Jowett, 1817~1893)은 “결코 후회하지 말고, 변명하지도 말며, 사과하지 마라”고 했으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은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 내 영혼을 괴롭히진 않으리....기본법에는 사과가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고 했다.
미국 연방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 1841~1935)는 “자기 결점을 동료가 처음 알게 되는 경우 중 9할은 사과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했고, 영국 작가 P. G. 우드하우스(P. G. Wodehouse, 1881~1975)는 “바람직한 삶의 원칙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된 부류의 사람이라면 사과를 원치 않으며, 그렇지 못한 족속들이나 그것으로 교묘하게 이익을 얻고자 한다”고 했다.
사과의 행위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아론 라자르(Aaron Lazare, 1935~2015)가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라는 잡지에 “걱정 말고, 사과해(Go head, say you’re sorry)”라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게 1995년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글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과를 나약함의 상징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과’보다는 ‘거짓말’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김호와 정재승은 [쿨하게 사과하라](2011)에서 “많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지난 3만 년간 인간이란 종은 다양한 지적 능력을 발달시켜 왔는데, 그 중에서 ‘사과하는 능력’은 비교적 ‘진화가 덜 된’ 행동이라고 지적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가 진화하면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고 성 선택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수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보다는, 거짓말로 모면하고 부인하는 편이 훨씬 더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해. 그래야 사과도 한 방에 끝나지.” 이기호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2009)에 나오는 말이다. 공감하거나 동의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사과가 ‘기술’ 또는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문 영역에 속하는 일이라는 점도 사과를 멀리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순진하게 무작정 사과부터 하고 본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영국의 소통 전문가 이언 레슬리(Ian Leslie)는 [다른 의견](2021)에서 사과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과를 너무 자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나쁜 경험을 한 번 이상 한 고객들은 여러 차례의 사과를 받았다. 이들은 아예 사과를 받지 못한 고객들보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여러 차례 사과를 받다 보면 그 사과는 점점 값어치가 떨어진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값싼 사과로, 심지어 모욕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미국 작가 수전 솔로빅(Susan W. Solovic, 1958-)은 [여성의 영향력과 성공을 위한 안내서]에서 자주 사과하는 사람으로 비치면 예기치 않은 사회적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의례든 아니든, 늘 미안하다고 말하다 보면 그것은 자기비하의 한 형태가 된다”면서 “당신 잘못이 아닌 경우에도 비난을 수용함으로써, 당신은 능력을 포기하고 프로의 이미지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과가 전문 영역이 되다보니,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진심과는 거리가 먼 엉터리 사과들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오래 전 영국 작가 길버트 체스터턴(Gilbert K. Chesterton, 1874-1936)은 “거만한 사과란 모욕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 주변엔 사과를 한다면서도 그런 모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과를 가리켜 ‘비(非)사과 사과(non-apology apology)’라고 한다. 갈등 해결이라는 사과의 장점은 취하면서 책임 인정에 따른 위험은 회피하기 위해 쓰는 수법이다. 이와 관련, 김호와 정재승은 [쿨하게 사과하라](2011)에서 사과할 때 쓰지 말아야 할 대표적인 어법으로 변명 사과, 조건부 사과, 수동태 사과 등 3가지를 들었다.
변명과 사과
첫째, 변명 사과다. 이 용어는 김호와 정재승이 쓴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인 사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러나’나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딴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변명 사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접속사는 변명으로 이어지기 쉽고 사과를 변명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철학자 닉 스미스는 ‘사과란 동의를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disagreement)’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표현이다....‘그러나’는 구차한 변명의 냄새를 풍기는 몹쓸 접속사다.”
둘째, 조건부 사과다. “만약 그랬다면 사과한다”는 식으로 조건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예컨대,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라는 표현은 가해자 쪽이 자신의 잘못을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동시에 피해자가 마치 너무 예민하거나 속이 좁아서 “별 문제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셋째, 수동태 사과다. “실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사고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책임 인정’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태도가 숨어 있는 사과 방식이다.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를 넌지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잡지 [뉴요커](2008년 12월 15일)에 실린 바바라 스몰러(Barbara Smaller)의 카툰은 “난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해주길 원하는 게 아녜요. 당신이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을 원하지”라고 말한다. 시인 이담하는 "사과는 사과를 갖고 하는 것도 입이나 손바닥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사과하고 싶다면 용서받을 때까지 늦가을 사과나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이런 참된 사과를 주고 받을 수 있을까?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