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영국인들은 자신이 자유인인 줄 알지만,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의원 선거 기간에만 자유인이고, 의원이 선출된 후에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노예 신세다.”

프랑스 계몽 사상가 장 작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말이다. 그는 [사회계약론](1762)에서 대중의 권력을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래 의도와 맞지 않는다며 자기통치를 논하는 영국인의 허세를 그렇게 비웃었다.

대중을 믿을 수 있는가? 18-19세기까지만 해도 대중은 믿기 어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당대의 진보 지식인이었던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조차도 탐욕스러운 대중의 투표권에 대해 우려했으며, 그래서 교육받은 사람에게는 표를 한 표보다 많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집주인, 고용주, 고객에 의한 강압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제는 이기심 또는 유권자의 이기적인 편파심이 더 큰 악의 원천이다. 다른 사람의 결정 때문에 나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유권자 개인의 이익, 계급의 이익, 자기 마음 속의 나쁜 감정으로 인해 ‘비열하고 짖궂은 투표’가 이루어지는 일이 훨씬 잦아졌다. 비밀투표를 하면 유권자는 부끄러움이나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투표권 행사

오늘날엔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선거가 사회진보에 기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살아 있다. 미국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찰스 린드블롬(Charles Lindblom, 1917~2018)은 197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소득과 부(富)를 더욱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을까. 왜 자신이 구하는 그밖의 여러 가지 가치를 평등히 분배하기 위해 한 표를 던지려 하지 않을까. 사회가 기본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데도 말이다. 이는 20세기의 최대의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린드불롬의 이런 의문은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미국 언론인 토마스 프랭크(Thomas Frank)가 2004년에 출간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유명한 책도 바로 그런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프랭크는 “캔자스는 미합중국 그 자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곳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낀다. 캔자스는 선호하는 여행지로는 전국에서 하위를 면치 못하지만 온갖 제품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시제품을 내놓고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캔자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때 미국 진보세력의 산실이었던 캔자스가 이젠 극우지역으로 변한 것이다! “캔자스는 모든 것이 평균인 땅이지만 그 평균의 특성은 일탈과 호전성, 분노다. 오늘날 캔자스는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반동의 선전으로 점철된 보수주의의 성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프랭크의 책에선 민주당의 위선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낙태 문제 등 사회문화적 가치와 종교적인 원인 등이 언급되긴 했지만, 보수에 대해 워낙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Keith E. Stanovich)는 [우리편 편향: 신념은 어떻게 편향이 되는가?](2021)에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유의 주장을 펼치는 교육받은 자유주의자는 아마도 이런 입장인 것 같다”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유권자들은 절대 그들의 금전적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해선 안 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왜냐? 나는 깨어 있는 시민이니까.”

‘내로남불’ 정치

프랭크의 입장을 그렇게까지 보는 것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깨어 있지만 너는 어리석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많으며, 이들이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데엔 흔쾌히 동의할 수 있다. 아니 동의를 넘어서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는 칭찬을 해줘도 좋겠다. 스타노비치는 “비영리기구(NPO)에서 일하는 자유주의자는 흔히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의 가치관 편에 선다. 마찬가지로 군대에 지원한 보수주의자 역시 대체로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입이 시원치 않은 수많은 공화당 투표자는 그들 자신의 금전적 이익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남들을 돕기 위해서 투표한다. 그러한 공화당 지지자의 행동을 당혹스러워 하는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지지자가 하는 행동과 정확히 똑같이 말이다....그들이 자신의 금전적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한다는 비판이 옳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금전적 이익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비합리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말이다. “나는 깨어 있지만 너는 어리석다”는 생각이 불필요한 정치적 갈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노비치는 “지금껏 민주당 지지자는 공화당 지지자를 인식론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해 왔다”고 지적했는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어찌 그리 똑같은 지 놀랍기도 하거니와 재미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이제 더 이상 그러지 말자. 각자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다름을 어리석음이나 사악함의 결과로 보는 ‘내로남불’이야말로 어리석은 동시에 사악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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