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글을 쓰는 선비들 중에는 혹 그의 글에 대한 결점을 말해주면 기뻐하며 즐겨 듣고 고치기를 흐르는 물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내고 스스로 그 결점을 알고도 일부러 고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자신의 문장을 자부하며 즐겨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 지제교(임금의 교서를 쓰는 담당관) 지은 글에 '승정원' 표지를 붙여 그 결점을 지적하자 화를 내며 아전을 꾸짖고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사룡(鄭士龍)은 자신이 지은 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누군가 결점을 말해주면 혼연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며 고치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였다. 퇴계가 혹 흠을 지적하여 주면 정사룡은 붓을 들어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고쳤는데, 퇴계도 그가 거스르지 않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일찍이 정시(庭試), 대궐 뜰에서 관원에게 보이던 시험)에 퇴계는 등왕각(騰王閣)을 제목으로 한 '배율(排律) 20운'을 짓고는 정사룡의 율시를 보자고 청하니, 정사룡은 자신이 기초한 것을 보여주었다.

“달빛이 처마의 빈 곳으로 들어오니 새벽에 앞서서 밝고,

바람이 성긴 주렴에 스며드니 가을 안 되었어도 서늘하구나.“ 

퇴계가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오늘 시험에 당신이 장원이 되지 않으면 그 누구가 되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퇴계는 자신의 시는 소매에 넣고 끝내 내놓지 않았으며 결국 시험지도 제출하지 않고 돌아갔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오기(傲忌)’ 편에 실린 글이다.

글을 쓴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글에 자부심을 갖기도 하고 그래서 글자 한 획이라도 바꾸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편집자에게 재량을 주는 사람도 있다. 두 가지 다 타당성은 있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성경의 일자 일획이라도 바꿀 수 없고...” 

나는 그 두 가지 중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어제의 일이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의 일이 내일로 이어지니, 그래서 풍수에서 말하는 것처럼 '온전히 아름다운 땅은 없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온전히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온전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 살면서 견지해야 할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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