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서애 유성룡은 여류 작가 허난설헌에 크게 주목하였다. 그는 본래 허봉의 친구였다. 친구가 죽은 지 한참 뒤, 하루는 친구의 동생 허균이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서 유성룡에게 보여주었다. 글을 읽고 난 유성룡은 이렇게 감탄하였다.
“훌륭하여라. 이것은 한갓 여성의 말이 아니다. 어찌하여 허씨 집안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가 이렇게도 많은가.”(유성룡, <난설헌집 뒤에 씀(跋蘭雪軒集)>, <<서애선생 별집>>, 제4권)
유성룡은 허난설헌의 글이 맑고 영롱하여 눈여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감탄하며, 빼어난 몇몇 작품은 중국 고대의 한나라와 위나라의 문인들보다도 뛰어나고, 대개의 작품은 당나라 전성기(盛唐)의 작품과 비길 만하다고 평하였다. 간혹 세태를 비판한 대목에 이르면 열사의 기풍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유성룡은 허균에게 신신당부하기를, 좋은 작품을 간추려서 보배처럼 간직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발문을 쓴 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태 전(선조 23년, 1590) 겨울이었다.(유성룡, 같은 글)
허난설헌 시 극찬한 유성룡
유성룡이 허난설헌의 시를 호평한 데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상대가 막역한 친구의 여동생이라서 예의상으로 건넨 말이 아니었다. 그는 <시에 능한 여자(女子能詩)>라는 별도의 글을 지어서 허난설헌의 시를 특별히 인용하기도 했다(유성룡, <<서애선생 별집>>, 제4권). 허난설헌 외에도 문인 조원의 첩 이옥봉을 여성 시인으로 기렸다. 유성룡이 극찬한 허난설헌의 시 가운데 한 수를 소개한다.
“달 비친 누대 가을밤은 깊어가는데 어여쁜 병풍은 비었네(月樓秋盡玉屛空)
서리는 갈대에 내리고 저물녘 강가에 기러기도 내려앉네(霜打蘆洲下暮鴻)
비파 한 곡조가 다하도록 사람은 자취도 없고(瑤瑟一彈人不見)
부용은 들판의 연못 속으로 굴러떨어지네(藕花零落野塘中)”
시는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가을밤의 정경을 한 장의 그림처럼 그려냈다. 유성룡의 시평은 이러했다. “세속을 초연히 벗어나 당나라 시와 같으니 사랑할 만하다.” 허난설헌은 나이 스물 남짓에 죽었으니, 가인박명이라는 옛말대로 재주가 너무 많아서 단명하였든가.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세상은 큰 혼란에 빠졌고, 유성룡이 써 준 <발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란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나서 허균은 편지를 보내, 유성룡에게 자신에 준 <발문>을 다시 보내주기를 간청하였다. 때는 선조 37년(1604) 8월이었다. 허균은 자신이 <발문>을 받은 해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유성룡은 자신이 쓴 글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너그러운 선비였기에, 허균이 요청한 <발문>이 그의 수중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허균, <서애 정승께 올림 갑진년(1604) 8월(上西厓相 甲辰八月)>, <<성소부부고>>, 제20권 참조).
강릉시, 허난설헌 기념관 현판 교체 '의혹'
동생 허균 덕분에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표절 시비에 휩싸여 말썽이 일어났다. 죽음이 임박하자 허난설헌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 허균이 그 작품을 아껴 하나도 없애지 않았다. 동생은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시인 주지번에게 허난설헌의 시집 원고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선조 29년(1606) 허난설헌의 시집이 먼저 명나라에서 간행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년이 지나자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해, 숙종 8년(1711, 일본은 호에이 8년) 일본 사람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가 허난설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최근 강릉시는 허난설헌 기념관의 현판을 멋대로 교체하여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신영복 선생이 쓴 멀쩡한 현판을 떼어내고 볼품도 없는 새 현판으로 갈아치웠다. 왜, 그랬을까. 혹시 윤석열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싫어하기라도 하여서일까. 권불십년이다. 권력자에 대한 아부는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강릉시의 해명을 요구한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