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실상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그 개개인이 이 우주 속에 하나의 작은 우주,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는 무한한 천체 속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감대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는 의미 내지는 예의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나를 위하면서도 더 넓은 의미에서 세상을 위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자기를 위하는 것이(爲己) 바로 남을 위하는 (爲人)것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이 타인을 위하는 것과 동일하다.”
중국의 사상가인 '이탁오'가 한 말이다. 그는 그 당시 중국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고 말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끝내 자기를 너무 가볍게 보게 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탁오가 택한 '스스로를 위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규칙에 맞는 경지처럼 수양하는 공자의 경우와 다른 것이었다.

공자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색을 좋아하지 않고, 권세를 누리지 않고, 득실을 걱정하지 않고, 후세를 위하여 가산을 늘릴 궁리를 하지 않고, 풍수를 따라서 음복을 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자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것은 대도(大道)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너무 높고 먼 것에 힘쓰기 때문에 세상의 실정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것이 바로 실용적으로 자신을 살피는 것이고 자신에게 절실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 속에 나오는 사상이다.
“생활의 천 가지 형태 중에서 각자는 하나밖에 알 수가 없거든, 남들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을 기쁘게만 할 필요가 있어. 되풀이 말하지만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거든.”

이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세상을 진일보시키기도 하고 돌이킬 수가 없는 세상과의 불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한 길 사람의 마음이고, 그 한 길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떠들썩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 때만 난세인가?"
조선 중기 때 사람인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58~1649)이 여러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때 한 사람이 〈시경〉 ‘소아(小雅) 정월’에 나오는 “어찌하여 지금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지금보다 뒤에 태어나지 않았나?”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가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음을 탄식했다.

그 말을 들은 현곡이 말하기를 “이 난리가 우리보다 먼저 일어났으면 우리 자손들이 그 화를 당할 것이네, 차라리 우리가 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대처함이 낮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또 어떤 학사(學士)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절반도 보기 전에 내던지고 탄식하기를 “책을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리니, 책을 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때 조위한은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양분이 몸을 윤택하게 하네, 책을 읽다가 비록 그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저절로 길이 진보하는 효과가 있다”고 답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에 만족하지를 못한다.
"나만 왜 이렇듯 힘들게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듯 잊어버리길 잘하는가?"

하지만 누구의 삶이나 힘들긴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때가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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