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보낸 7일'...위험하고도 쓸쓸한 '북 토크쇼'를 마치고
신정일의 '길 위에서'
나는 방외지사의 삶을 살았다. 서울 신사동에 있는 노작가의 이지트에서 이번에 나온 책 <지옥에서 보낸 7일>의 <신정일의 위험하고도 쓸쓸한 북 토크쇼>를 마치고 10시 40분 차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리며 내 거처가 있는 전주라는 도시를 향해 내려가며 나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운명이 내게 정해준 길을 끝까지 걸어왔다.“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추후의 삶은 무엇일까? 나는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오래도 살았다. 그러다가 보니 내가 사람들로부터 여러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판 김정호’, ‘현대판 이중환’, ‘현대판 신삿갓’, ‘향토사학자’ ,‘걷기 도사’ 라는 별칭 외에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 라고 했고, 도종환 시인은 ‘길의 시인’, 조용헌 선생은 ‘방외지사’라고 했으며 김지하 시인은 나를 두고 ‘삼남 일대를 걸어 다니는 민족민중사상가’,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걸어 다니는 네이버'라는 별칭을 과하게 붙여주었다.
그 중 내가 살아가는 방식만 놓고 보면 거기에 가장 걸 맞는 말은 아마도 ‘방외지사’라는 말일 것이다. 강호동양학연구소장인 조용헌 선생이 나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외지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방외지사(方外之士)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자격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방외지사가 될 수 없다. 월급쟁이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면 만 리를 가 보아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되도록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차를 타고 발통 위에 얹혀 다니면 주마간산에 그치고 만다. 산천을 두 발로 딛고 다녀야만 스파크가 튄다. 스파크가 튀어야 깊이가 생기는 것 아닌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인물이 전주에 사는 신정일이다.”
말이 좋아서 방외지사지, 달리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들이건 그 누구에게도 조그마한 금전적 혜택을 줄 수 없는 무능력자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모두가 선망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소속이 없으므로 자유롭지만, 글을 쓰지 않거나 일을 안 하면, 통장에는 일 원 한 푼 들어오는 법이 없다. 프리랜서의 삶은, 철저한 자기 관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방외(方外)란 유가(儒家)에서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를 가리키는 말이고 방내(方內)는 유가를 공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외지사의 삶을 곧이곧대로 살다간 사람이 바로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었다. 김시습의 외모에 관한 글이 율곡이 지은 <김시습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사람 된 품이 얼굴은 못 생겼고 키는 작으나 호매영발(豪邁英發)하고 간솔(簡率)하여 위의(威儀)가 있으며 경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세(時勢)에 격상(激傷)하여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다. 세상을 따라 저앙(低仰)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몸을 돌보지 아니한 채 방외(方外, 속세를 버린 세계)로 방랑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산천치고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을 만나면 그곳에 자리 잡고 고도에 등람(登覽)하면 반드시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그치지 않고 불렀다.”
매월당 선생의 행적을 보면 그 자신의 성품이 본래부터 아웃사이더였는데, 그 당시 정치상황과 맞물려서 방외지사의 삶을 살다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매월당 선생과 달리 나의 방랑은 가난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나의 성격 자체가 누구와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더욱 방외로 떠돈 것인지도 모른다.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홀로 높은 경계에 올라가는 사람은, 그래서 속물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 곧 산과 골짜기에 숨은 사람은 제약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중략…) 무릇 이치가 지극한데 이르면 내외의 분별이 사라진다.
방외에서 노닐음이 내외의 분별이 사라진 완전성에 이끌려 가는 경우도 없고, 내외가 여전히 구별된 곳에서 방외의 노닐음이 완전성에 이끌려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항시 방외에 노닐어 내심을 확대시키고 무심으로 사물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종일 형상 지닌 것을 다루어도 그 정신과 기운이 변하지 않고 만 가지 조짐을 살펴보아 담담자약하다”
장자의 「대종사」에 실려 있는 글이다. 나 역시 장자에 실린 글과 비슷하게 살아보려는 마음 하나만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매한 이상을 지닌 방외지사와 나하고는 하늘과 땅처럼 깊은 간극이 있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회성이 떨어진다느니, 대인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느니, 하는 여러 말을 들으면서 아웃사이더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 세상을 바라보고 혼자서 나름대로의 공부법을 세웠고, 수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편력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창조성은 세상의 이치와는 조금은 동떨어진 편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용헌 선생은 다시 나를 이렇게 평했다.
“어찌 보면 그는 대안교육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면 그는 방외지사가 될 수 없었다. 전국의 모든 강과 바다, 길, 그리고 옛길을 어떻게 걸어 다닐 생각을 하였겠는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처럼, 무 학력의 정신이 신정일로 하여금, 전국의 산하를 걷도록 만들었다. 그는 학벌도 없고, 조직의 보호도 없었고, 월급도 없는 삶을 이제까지 살아왔다. 뚝심 하나로 밀어부쳤다.”
그러던 내가 백팔십도 변하게 된 것은 혼자만의 생활을 끝내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부터였다. 제대를 하고, 용감하게 제주도로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육지로 나와 사업은 부업이고, 문화운동이 본업이라고 할 정도로 그 일에 매진한 것도,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알게 한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단체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군대는 거대한 사회였고,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준 대학 중의 대학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 속에만 매몰되어 있던 나의 영혼이, 나 자신 밖으로 나가서 ‘변화가 진리’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체득하도록 했던 군대생활은 나에게 있어, 잠자고 있던 영혼을 깨운 카오스였다고 할까? 하지만 그 우연 같은 필연, 내가 내 인생의 출구로 제주도를 선택해서 내 인생을 ‘지독한 노동의 시절‘ 로 나를 들이밀었었다. 그것이 그 시대 상황 속에서 간첩용의자로 안기부로 끌려가게 만들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 실린 글과 같이 내 인생을 새롭게 디자인하게 할 수 있게 했던 곳이 군대였고, 안기부였다. 훌훌 털어내고 나니 가뿐하다. 새벽 한 시에 전주에 도착 집을 향해 걸어가며 내가 나에게 다짐한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두려워 말고 나가자, 나여! 나, 신정일이여!
※추신: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우리 땅 걷기의 모든 분들, 스칼렛 박수자, 낡은 책상 최명운, 조프로 조건진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