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가 꿈꾼 세상과 '촛불 혁명'
백승종의 역사칼럼
16세기가 되면 선비들의 수기(修己, 한 몸과 마음을 닦는 일)에 관한 조선 선비들의 담론은 더욱 깊어진다. 그들은 주희의 학설을 철저히 내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 선비들은 ‘정심성의(正心 誠意)’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요체라고 확신했다. 본디 이것은 주희의 주장이었다. 조광조는 주희의 견해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마음은 출신의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다.”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타고난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부한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어법으로 보면, 선비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존재였다. 수기(修己)에 관한 조광조와 그 동지들의 인식 수준은 송나라에서 집대성된 성리학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주희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킨 쾌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1518년(중종 13) 5월 4일, 석강(夕講)에 나는 주목했다. 그때 조원기(趙元紀, 조광조의 숙부)와 조광조 등이 경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유심히 살펴보자(『중종실록』, 중종 13년 5월 4일의 기사).
"특진관 조원기가 (『대학』의) 본문을 살펴보고 나서 아뢰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는 정심성의(正心誠意)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심성의만 하면 이른바 충신의 도(道)까지도 다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늘 정심성의를 임금에게 권하자,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정심성의란 말을 임금께서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배운 것이 이 넉 자뿐이다.’ 효종과 광종은 송나라의 어진 임금이었으나 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정심성의로 일을 하신다면 장차 교만하게 될 우려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
시강관 신광한(申光漢)이 아뢰었다. (……) 사노(私奴) 여형(呂衡)이란 사람은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상감사 김)안국에게서 『소학(小學)』을 빌려다 읽었고, 안국이 (경상감사 자리에서) 교체되어 (서울로) 올 때 글을 지어서 바쳤습니다. 그 글에는 유자(儒者)들도 미치지 못할 (탁월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안국이 여기(곧 서울) 있다면 그 글을 가져와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광조가 아뢰었다. 그(즉 여형)가 지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일의 선후를 아는 사람입니다. 천한 신분임에도 이와 같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허통(許通: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줌)할 수는 없다 해도, 특별한 포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선 면천(免賤: 양민의 신분을 허락)을 허락하소서. 또 제가 들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대대로 주인에게 충의를 다하였다고 합니다. 여형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천한 사람 중에서 어찌 쉽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의 본래 마음은 귀천이 다르지 않은 법입니다. 타고난 천성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의 악한 점을 바로잡는 것은 오직 교화(敎化)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형은 16세기 경상도에 살았던 사노(私奴)였다. 그런데 그는 학문을 좋아했다. 마침 조광조의 동료 김안국(金安國)이 경상감사가 되었기 때문에, 여형의 인품과 능력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조광조는 경연에서 여형의 사례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리고 나서 여형은 물론이고 그의 부조(父祖)가지 표창하자고도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광조가 여형의 실례를 들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귀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정심성의로 수기에 전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조광조는 주장했다. 사노 여형의 사례는 당시의 진보적인 성리학자들에게 여간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19년(중종 14) 겨울, 조광조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종과 몇몇 측근들의 미움을 받아, 조광조는 유배지 화순에서 사약을 마시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향년은 겨우 38세였다. 무슨 일이든 운이 맞아야 하는 모양이다.
앞의 이야기에 덧붙여, 나는 조광조가 전개한 <<향약>> 보급 사업도 일반이 짐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인 사업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조광조 등은 향약 보급을 기회로 삼아서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조정의 잘잘못을 마을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할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샛말로, 누구나 언론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데 향약 보급의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를 극도로 혐오하였고, 급기야는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탄압하였다.
한 가지 증거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조광조가 실각하자 경기도 일원의 '향약 무리'가 의금부로 달려와서 조광조 등을 처벌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또, 많은 선비가 대궐 문을 부수고 궐내로 진입하여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혹자는 조광조의 개혁이 기껏해야 설익은 것이요, 지배층 내부의 개혁 운동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무턱대고 조광조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정치는 대중으로부터, 시민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른바 ‘촛불 혁명’으로 정치의 무대에 올라간 시민들을 일부 기득권 세력이 다시 무대 바깥으로 몰아낸 사실을 우리는 지난 정권 때 목격하였다.
시민은 거수기도 아니고, 선거 때만 이용당하는 가련한 존재여서도 안 된다. 이제 그런 생각을 바꾸어 시민이 국가의 현안을 주무르는 직접 민주주의의 흐름을 강화할 때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조광조의 일은 500년 전에 일어난 것이요,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실은 피차가 별로 차이가 없는 세상에서 어찌하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을까,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동질적이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