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몇 해만 더 살았더라면
백승종의 역사칼럼
세종은 궐내의 벼슬아치(‘吏輩’) 10여 명에게 최우선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인데, 왕은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궁중에서 시범사업까지 벌였던 것이다. 누구나 아는 대로 한글은 세계역사상 가장 늦게 등장한 표기방식인 셈이었고, 그런 덕분에 그 수준은 세계 최고였으니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왕의 한글 실험은 계속되었다. 세종 28년(1446) 3월, 소헌왕후(1395-1446)가 세상을 떴다. 왕비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 왕은 몸소 찬불가를 지었는데, 한글로 쓴 <<월인천강지곡>> 3권(보물 제 398호)이 그것이다. 또, 왕은 둘째아들 진양대군(세조)에게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 역시 한글로 완성하게 하였다(보물 제 523호).
<<실록>>에는 왕과 대군이 한글로 2종의 책자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왕실차원에서 한글로 소헌왕후의 추모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점은 기억해야할 일이다.
한글을 정식으로 반포한 다음에 왕은 국가의 공식문서도 왕은 한글로 작성하였다. 대간이 죄를 짓자 세종은 그들을 질책하는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세종 28년 10월 10일). 지엄한 통치문서를 왕이 직접 한글로 기록했다는 점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로써 중추적인 권력기관 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한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시절 고관들 가운데는 이미 한글을 익힌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이 궁지에 몰린 대간을 극구 변호했을 때, 수양대군은 세종이 의금부에 보낸 한글 문서를 꺼내보였다. 그러자 이계전 등은 그 문서를 읽고나서, “대간은 나랏 일을 의논한 것뿐이옵니다. 만약 그들을 처벌하신다면, 앞으로는 당연히 아뢰어야 할 일도 감히 거론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이계전 등 대신들은 즉석에서 거침 없이 한글문서를 읽고 대응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세종은 한글문서를 이용해서 통치활동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좌의정 하연 앞에 두어 장의 한글문서를 펼쳐놓고 비밀리에 국사를 논의하였다(세종 30년 7월 27일). 왕은 한글이 국가통치에 긴요한 문서를 생산하는데 아무런 손색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두루 감안하면, 왕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취재’)에 한글 능력시험을 포함시킨 것은 외려 당연한 일이었다. 왕은 임용후보자들에게 《훈민정음》을 시험치게 하라며, “문법(‘의리’)은 통달하지 못하더라도 글자를 조합하는 능력(‘合字’)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라.”고 요구했다(세종 28년 12월 26일).
한글에 거는 왕의 기대는 무척 컸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보이듯, 세종은 유교 경전도 장차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의 경전 공부를 돕고자 하였다. 실제로도 그는 경전에 조예가 깊은 집현전 직제학 김문에게 명하여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다.
불행히도 김문이 중풍으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사업은 차질을 빚었다(세종 30년 3월 13일). 세종은 김문의 후임으로 김구를 선발하여 사서의 번역 작업을 계속하였다(세종 30년 3월 28일).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태 뒤에는 세종 자신이 세상을 뜨고 말아, 유교경전의 번역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 사업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150년 가량이나 세월을 끌다가 선조 때 가까스로 마무리되었다.
세종이 몇 해만 더 살았더라면 결과가 싹 달라질 수도 있었을 터라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세종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16세기에 유럽에서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내놓으며, 신의 말씀은 라틴어로만 전해진다는 통념에 도전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라틴어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국어로 문학작품을 썼다.
시간이 흐르자 더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이에 합세했다. 유럽에는 생기발랄한 모국어의 장점을 살린 문화가 융성했다. 그렇게 이룩된 유럽 근대문명이 19세기 말부터 전세계를 석권하였다. 만약 우리도 세종의 정신을 본받아 자국어를 중심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더라면 어땠을까. 그 점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운 심정이다.
한글이 훌륭하다는 칭찬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좋은 한글을 가지고 우리 선조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비판하는 작업도 따라야 한다. 정약용은 왜, 한글로 <목민심서>를 쓰지 않았을까. 정조는 왜, 당송시대의 낡은 한문에만 집착하였을까. 홍대용과 김정희는 물론이요, 최한기 같은 선각자도 왜, 한문으로만 글을 썼을까. 이런 비판조 섞인 검토작업도 등한히 할 것이 아니다. 한글날에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다.
/백승종(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