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 사회로의 전환과 노동운동의 과제

송명진( 한국노총 기획정책국장)

2020-04-20     송명진

사회개혁의 열망과 노동정책의 전환

한국사회는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전쟁위기가 일상이었던 시절이 불과 2년 전이다. 그 사이 우리는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 반공보수 세력의 괴멸적 붕괴와 새민주정부 수립을 경험했다. 정치적 적폐청산이 추진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복원되며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달렸다. 놀라운 변화는 올해 들어 한반도 전체에서의 지각변동으로 확대되었다. 남북 정상의 모든 몸짓과 대화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된 4.27 판문점 선언은 낡은 이데올로기와 증오의 시대가 종료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나아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가 역사적 대전환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뚜렷이 일깨웠다.

한반도의 냉전체제와 한국사회의 보수기득권이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사회경제개혁의 요구도 더욱 커졌다. 실상 지난 촛불은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를 넘어 불공정과 불평등에 대한 인내의 한계점에서 터져 나온 비명 같은 것이기에, 촛불정신 계승을 자임한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새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양극화해소를 핵심 사회경제정책의 방향으로 설정하였고, 이를 재벌대기업 위주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대체하는 소득 주도 성장과 결합시켰다.

새로운 경제성장 전략과 사회경제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노동정책의 방향 역시 달라져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보수정부의 노동배제와 탄압에 기초한 일방적 노동 유연화 대신 포용적 노동정책을 지향하며 ‘노동 존중 사회’를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취임 직후부터 잇따른 친노동정책이 추진되며 양대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노동뿐만 아니라 비정규∙청년∙여성 등 취약계층 미조직노동자까지 기대와 희망이 커졌다. 가히 ‘체제전환적 국면’이라고 여겨질 만 했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1년이 지난 지금, 적어도 노동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당사자인 노동자들에게 만족보다는 실망이, 기대보다는 우려가 늘었다. 현 정부가 정치개혁과 남북관계 개선 등의 개혁과제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과 달리 유독 사회·경제 개혁에서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우려의 시선은 노동정책의 후퇴가 문재인 정부의 개혁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특정 정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촛불혁명으로 발현된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개혁열망을 좌초시키고 개혁동력을 분산시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또다시 먼 훗날의 과제로 미루는 후과를 남기게 될 것이다. 하기에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진영의 다수는 현 정부가 노동 존중 정책과 소득주도 성장전략을 더 이상의 지체와 후퇴 없이 이행하기를 바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존중정책의 배경과 경과

현 정부에서 노동존중정책이 추진된 배경과 현재까지의 경과를 돌아보자.

전후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에서의 가혹한 노동착취에 기반 했다.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주적 노동운동은 싹부터 짓밟혔고 노동권은 있으나마나한 법전상의 조문들로만 존재했다.

87년 민주화항쟁과 경제적 호조건을 배경으로 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며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과 노동권 신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들에 보장된 법∙제도적 권리는 허술했고, 집단적 노동권의 핵심인 교섭권은 기업별 체제 안에 갇혔다. 반면, 자동화기기 도입 등 기술합리화, 정규직 감원 및 외주화 등의 경영합리화 전략으로 새롭게 무장한 자본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와 파견제도의 도입을 관철하며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 하에서 노동 유연화를 가속화했다. 임금상승추세가 둔화되고 고용 불안정성이 증가했다.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특수고용직 등 유연고용형태가 확산되며, 노동시장 내 격차와 차별이 확대됐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보수정부 하에서 더욱 극심해졌고, 양질의 일자리 감소는 청년실업과 저출산으로 이어지며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했다. 보수 정권은 문제 해결에 있어 사회주체들의 동의와 자발성을 이끌어내려 하지 않고, 모든 원인을 조직노동의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노동권을 해체하려는데 주력했다. 보수정권 9년간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복수노조 창구단일화를 내용으로 하는 노조법개악, 일반해고와 사용자의 일방적인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을 가능케 한 노동부 ‘양대지침’과 같은 극단적인 노동 유연화와 노동운동의 무력화가 획책되며, 노사∙노정 관계는 갈등과 대결로 치달았다.

하지만 재벌대기업과 자산보유자가 부를 독식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경제구조, 기득권 집단의 갑질, 불합리한 기회구조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는 눈에 띄게 커졌다. 촛불혁명과정과 지난 조기대선에서 노동∙복지 의제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다. 진보∙개혁세력은 공히 “노동없는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포용적 노동체제와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추구했다. 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주축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격차 해소,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취임 직후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위원회 신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대폭적 인상과 같은 ‘친노동’ 행보를 통해 새로운 노동체제 수립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인수위원회를 대신해 설치되었던 국정기획 자문위원회에서는 소득 주도 성장과 노동 존중 사회 실현, 포용적 복지국가 수립을 새 정부의 주요 국정전략으로 확립하였다. 또한 한국노총 위원장의 제안을 계기로 지난 보수정권에서 파타난 사회적 대화의 복원과 기구 개편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포용 정책은 초기의 웅장했던 경적소리가 무색할 만큼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자본의 반발이라는 뻔히 예상된 장애조차 돌파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사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의제이지만,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에 근거한 경제구조를 혁신하는데 있어 핵심 과제였다. 노동조합들은 당시 법원의 판결 경향을 볼 때 노동에 유리한 정책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근로기준법상의 1주일이 5일이냐, 7일이냐의 물음에 5일을 고집했던 노동부의 과거 해석을 시정하는 간단하고 명쾌한 해법을 포기했다. 대신 여야 간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절충안이 통과될 수밖에 없는 국회에서 이 사안을 다루기로 하는, 즉 복잡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결국 휴일을 포함한 1주에 최대 52시간까지 노동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조건으로 휴일 연장 근로의 중복할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문이 추가됐다. 노동조합운동은 이러한 결정의 결과만이 아니라 논의과정에서 노동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에 더 충격이 컸다. 실제 양대노총 지도부는 각기 가맹조직들로부터 여야정당들의 소위 ‘노동계 패싱’의 책임을 추궁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보다 결정적인 타격은 최저임금의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이었다. 산입범위 문제는 작년 최저임금 인상 결정 이후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에 대한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의 과장과 왜곡, 선동에 의해 정치 의제화 된 사안이었다. 집권여당은 최저임금 인상 정책을 옹호하며 근본적 해법을 제기하고 당사자 주체간의 합의를 통한 사회갈등의 최소화를 추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에서의 유불리에 대한 정치적 판단만을 따라 이 사안을 또다시 국회로 가져갔다. 여야 의원들은 노동계의 거센 반대를 고임금 노동자의 기득권 지키기로 매도하며 매달 지급되는 모든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간주될 수 있게 하는 최악의 법안을 즉석에서 고안해 통과시켰다.

양대노총은 반발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청구하며, 최저임금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대화기구에 불참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장 최저임금위원회의 논의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자와 공익위원들만의 참여로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은 민주당과 최저임금 제도개선과 정책협약 이행에 대한 합의를 맺고 그것을 계기로 최저임금위원회와 사회적 대화기구에 복귀한 반면 민주노총은 불참을 유지했다. 노동자 위원 절반이 빠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사용자측은 소상공인의 지불능력을 이유로 업종별 차등적용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며 퇴장했고, 공익위원들은 고용지표의 악화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내세워 10%대의 인상률을 마지노선으로 못 박았다. 결국 사실상 공익위원들의 결정에 따라 10.9% 인상률로 내년 최저임금이 결정되었고, 대통령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이라는 공약이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최저임금 결정 이후에도 논쟁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사용자단체와 보수야당들은 최저임금 1만원 정책에 대한 비판을 넘어 소득 존중 정책의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 존중 정책은 그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대통령과 정부의 입장발표에도 불구하고 제 궤도에서 벗어나 경계선을 위태로이 달리고 있다. 조직내부의 의사결정구조와 문화, 운동전략과 기풍의 차이로 양대노총의 공조는 느슨해졌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실제 구성과 논의의 시기를 늦출 수 없어 민주노총의 불참에도 개문발차 했다.

노동체제전환을 위한 노동운동의 과제

2019년 7월, 흐름을 쫓아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던 한반도 정세는 숨고르기에 들어간 듯싶고, 노동자들의 큰 성원과 기대를 안고 출발했던 포용적 노동정책도 주춤대는 것처럼 보인다. 자칫 과거로 퇴행할 수 있다는 불안이나, 그동안의 변화가 실상은 심층까지 다다르지 못한 표층에서의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섣부른 체념도 목격된다. 하지만 사회변화는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의지, 역량, 전략을 갖춘 행위자들이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서로 대결하고 협력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역사적 대전환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요인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대안역량의 강화와 새로운 질서 구축에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사회적 운동의 힘으로 열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 존중 사회로의 전환을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운동은 근거 없는 낙관이나 대책 없는 조바심 대신 운동 목표의 재확립과 조성된 여건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기초해 전략적이면서 공세적으로 사회경제개혁을 추동해가야 한다.

현재 노동체제 전환에 있어 제기되는 과제와 노동조합운동의 대응방향에 있어 특히 강조하고 싶은 지점들을 위주로 간략히 정리해본다.

먼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이후에도 최저임금 수준과 제도에 대한 사회적 논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오히려 이를 경제민주화와 사회안전망 확충을 전면적으로 제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들이 노동 존중 정책을 강화하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요건임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저임금인상에 대한 소상공인 단체의 반발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 프랜차이즈 본사의 무분별한 점포확대와 과도한 가맹수수료 문제, 중소기업 노조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원청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문제 등 노동자 권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슈들에서부터 책임 있게 개입해 나갈 필요가 있다.

노동권 강화에 있어서는 정부와 여당이 ILO핵심협약 비준과 노동조합 조직률 및 단체협약 적용률 확대를 위한 법․제도 개선을 수차례 공언해온 만큼, 노조 할 권리 확대와 산별교섭권 강화의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이에 더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확산, 최저임금 및 통상임금 범위 조정, 주52시간제 시행에 따른 후속대책 마련도 핵심노동의제로 제기될 가능성이 커 이에 대한 현장실태 파악 등 정책적 대비를 강화해야 한다. 최근 20대 국회 후반기 환노위 구성을 미루어볼 때 노동 존중 정책 과제들의 국회 입법화가 순탄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정부 의지와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은 다양한 교섭공간을 대비한 유연한 협상전략을 마련하는 한편, 핵심의제들에 있어선 캠페인과 동원전략을 병행해 아직까지 기울어진 협상장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노동 존중 사회로의 전환을 추동하는 핵심 주체이다. 하지만 취약한 조직력과 헤게모니 역량으로 사회변화를 선도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과 조직력 강화는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이다. 기존 교조적 이론의 틀로만 해석하거나 과거의 관행이나 관성적 태도만을 고집할 경우 현재의 사회변화를 감당키 어려워 보인다. 운동이념과 이론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조직문화와 사업의 혁신도 해묵었으나 생략할 수 없는 숙제다. 조직 확대는 끈질기게 추구해야할 목표이나 그에 앞서 노동운동의 단결이 최고의 가치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송명진/<사람과 언론> 제2호(201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