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비 '송덕봉'의 당당하고 통쾌한 '편지'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2-09-28     백승종 객원논설위원

16세기 후반 조선의 한 여성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애정문제를 토로한 것이었다. 문제의 편지에는 작자인 상류층 여성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편지의 수령인인 성리학자의 내면세계와 그 당시 조선사회의 분위기 또는 관습을 엿볼 수 있는 단서도 발견된다.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그대가 제게 얼마나 관대한 척하시는지를 짐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군자(君子)는 항상 스스로 법도에 맞게 행동하며 자신의 사소한 감정까지 온전히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현께서 가르치신 바일 것입니다.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한 사나이가 자신의 아내나 아이들을 위하여 실천에 옮기는 하찮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탐욕스럽고 잡된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아 마음이 지극히 맑다면, 이미 군자가 될 바른 길을 걷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데도 그대는 어찌하여 꽉 막힌 규문(閨門) 뒤에 웅크리고 있는 아내에게 그대가 관대하게 대해줬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그저 서너 달 동안 첩실을 아니 두고 홀로 지내셨다 하여, 마치 그 덕이 넘치는 것처럼 자부하며 그렇게 뻐기시는 것인가요? 그대는 정말로 나의 호감을 크게 살만한 일을 하셨다고 믿으시는가요?”

이 편지를 읽은 여러분의 소감은 어떠하실까요. 저는 네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 아하 ... 그때도 선비가 첩을 두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 송덕봉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될 일이었거든요.

둘째, 아내의 억울함이 묻어 나옵니다. 그렇겠지요. 남편 미암 유희춘이 거의 20년 동안 유배살이 할 때 자신은 죽어라 고생을 하였는데요, 의리도 없이 첩 두고 살 생각을 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 어찌 분노가 치밀어오르지 않겠어요.

셋째, 그래도 미암은 큰 선비였다는 점이죠. 아내가 자신을 공박한 부끄러운 편지인데요. 기록으로 남겼어요. 아마도 미암은 아내 송덕봉의 날카로운 유교적 논리며 잘 닦인 문장이 자랑스러웠던 게지요.

넷째, 16세기 여성 지식인의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유교를 빌려서 유교의 선비를 공박하는 통쾌함이 있어요.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전유한 사람들에게만 무기가 되란 법이 없는 것입니다.

짤막한 글 하나라도 음미하며 뜻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또 저와는 다른 어떤 귀중한 생각을 하셨겠지요.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