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관용은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2022-09-26     강준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196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의 최대 약점은 그가 가톨릭 신도라는 점이었다. 1960년 미국 전체적으로 가톨릭 신자의 비율은 20-30%로 추정되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런 비율이라기보다는 주류인 프로테스탄트의 가톨릭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었다. 일부 유명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사실상 가톨릭 신도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까지 발표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으로 자기계발의 거물이 된 미국 목사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이 그런 논란의 한복판에 선 인물이었다. 필은 150명의 개신교 목사들을 대표해 가톨릭 대통령을 뽑으면 미국문화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며, 미국의 이익보다는 가톨릭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용과 불관용 

이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물론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1-1971)와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필을 비롯한 목사들의 편견을 비판하고 나서자, 필은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그러자 이번엔 케네디를 반대하는 다른 목사들이 크게 반발해 필은 자신이 만든 위원회로부터 축출당한 건 물론 한동안 비난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대선이 가톨릭 문제로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말해주는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케네디는, 자신의 종교는 태어나면서 결정된 것이고 교회든 교리든 자신은 거기에 별로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방법엔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선거 초기부터 민주당이 패배한 195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게 빠져 나갔던 가톨릭 민주당원을 다시 민주당으로 끌어오는 것을 필승 전략의 기본으로 설정했다. 그렇게 하려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배척하면 안되는 것이었기에 그런 소극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적 가치’를 내세워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케네디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부터 종교문제를 관용(tolerance)의 문제로 바꿔버렸다. 자신에게 투표하는 것은 개방적인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대하는 것은 편협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이 전략의 시험대는 웨스트버지니아 예선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프로테스탄트가 많은 주였고 케네디의 경쟁자인 휴버트 험프리(Hubert H. Humphrey, 1911-1978)는 프로테스탄트였다.

케네디의 ‘관용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H. White, 1915-1986)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일단 문제가 관용 또는 불관용의 문제로 되자 휴버트 험프리는 교살당해 버렸다. 누구도 험프리에 투표해서는 자신의 관용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케네디에게 투표함으로써 적어도 자신이 관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자신감·자존감과 관용 

이 에피소드가 시사하듯, 관용은 미덕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위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자신이 관용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관용을 실천하는 것 사이의 괴리가 크다. 바꿔 말해, 남들이 알아주는 맛이 없다면 굳이 관용적이어야 할 이유는 사라지고 만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과 실천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현실 세계에서 관용은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표현이라는 메시지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인도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불관용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고 했다. 영국의 유대교 철학자이자 신학자 조노선 색스(Jonathan Sacks, 1948-2020)는 “관용은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자존감의 결핍은 불안과 외국인 혐오증을 일으킨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과 1차대전 이후 독일인들이 느꼈던 굴욕감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했다.

미국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Wendy Brown, 1955-)도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2006)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관용의 포용력은 그 자체로 권력의 표현이자 그 권력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강하고 안전한 자들은 관용적일 수 있다. 하지만 주변적이고 안전에서 배제된 자들은 그럴 수 없다.”

관용이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관용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예컨대, 미국 정치가 웬델 윌키(Wendell K. Willkie, 1892~1944)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관용적으로’ 대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관용은 베푸는 자의 우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는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에 근거한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긴 하지만, 사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베푸는 자의 우위를 전제로 해도 좋으니 제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이들이 관용을 많이 베풀어달라고 요청할 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게다. 우위를 전제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 우위의 횡포를 무자비하게 부리는 갑질에 중독된 자들의 사전엔 ‘관용’이란 단어가 없다. 이런 현실에 분노하기도 바쁜 처지에서 관용은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는 게 무어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