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산 붉은 꽃무릇 '활짝'...‘목마와 숙녀’, ‘향수’를 떠올리다
포토 에세이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나 잠시 내가 알든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귀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작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이면 떠오는 박인환 선생의 시입니다. 박인희 선생의 낭송으로 들으면 더욱 감미롭고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는 시인 것 같아 읊조려 봅니다.
문득 가을이 되니 여고시절 친구들과 함께 외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목마와 숙녀를 떠올리며 세계소리축제가 열리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뒤편 건지산 공원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붉은 꽃무릇이 활짝 핀 채 오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군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꽃무릇 앞에서 자연스레 멈춰 서서 한참을 꽃들과 마주했습니다.
잎이 나는 시기와 꽃이 피는 시기가 전혀 다르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죠. '석산'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9-10월에 붉은 꽃을 피웁니다. 잎은 꽃이 진 뒤 나와 다음해 5월쯤 시들어버리는 희귀한 이 꽃무릇은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 등이 군락지로 유명합니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비슷하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서로 다릅니다. 꽃무릇은 여러해살이 풀로 서해안과 남부지방의 사찰 근처에 주로 분포하면서 초가을에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잎은 꽃이 진 뒤 나와서 다음 해 봄에 집니다.
반면 상사화는 여름에 잎이 없는 꽃자루 위에 4~8송이씩 무리지어 연분홍색 꽃을 피우는데, 잎은 꽃이 피기 전에 말라 죽고 맙니다. 다만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특성은 비슷하여 흔히 구별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립고 사모하면 상사화(相思花)라고 부를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상사화는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여 상사화라고 부른답니다. 이처럼 상사화는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붉은 상사화만 있는 줄 알았더니 순백색 상사화도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품종인 하얀 상사화는 부안군 위도에서 자생하는 터라 ‘위도상사화’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멀리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를 가지 않더라도 전주시내에서 가까운 건지산에도 붉은 꽃무릇이 흐드러지게 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가을 정취는 물론 박인환 선생의 ‘목마와 숙녀’, 정지용 선생의 ‘향수’를 절로 떠오르게 합니다. 이동원·박인수 선생이 부른 노래로 이 시를 들으면 더욱 정취를 더해주는 계절입니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작
건지산 숲길을 걷다 보면 꽃무릇 외에도 덤으로 가을의 전령사인 나팔꽃과 호박꽃 등을 지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살고 계신 분들은 잠깐 시간을 내어 고즈넉한 가을꽃들과 눈을 맞추며 잠시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사진=김미선(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