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행복은 고통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고통은 생명을 고양시킨다는 입장을 취했다. 1847년 스코틀랜드의 내과 의사인 제임스 심프슨(James Y. Simpson, 1811-1870)이 클로르포름으로 마취하여 분만에 성공하자, 에든버러의 한 칼뱅파 목사는 즉시 심프슨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여자가 출산의 고통을 참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출산하는 여성이 마취를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1853년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 일곱 번째 아이인 레오폴드를 출산할 때 마취를 한 이후에서야 사라졌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고, 슬픔을 통해 뚜렷한 전망을 획득할 수 있다. 고통과 아픔이 통찰력의 창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미국의 유대교 랍비 벤자민 블레흐(Benjamin Blech, 1933-)의 말이다. 이에 대해 미국 역사학자 베라 슈와츠(Vera Schwarcz, 1947-)는 [사회적 고통](1997)에서 “유대인들이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픔을 통해 인간의 지식이 갖는 한계에 의문을 제기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며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고통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맑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고통이 인간을 고귀하게 하고, 고통을 겪은 자만이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기독교적인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뭇 다르긴 하지만 고통에서 무언가 얻을 게 있다고 본다는 점에선 기독교와 유대교는 다를 게 없다. 종교와 무관하게 고통을 높게 평가하거나 긍정 평가한 이들은 창조성에 집착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이면의 기쁨도 강렬해진다.”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의 말이다. 29세에 결핵으로 죽은 그는 고통에 대해 피학쾌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런 태도를 물려받은 대표적 인물이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다. 니체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창조성으로 몰아가는 자극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다음 명언들을 남겼다. “내 생애에서 가장 아팠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나 자신에 대해 가장 행복하게 느꼈던 때이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고통과 무(無)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고통을 선택할 것이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의 말이다. 미국 언론인 마이클 르고(Michael LeGault, 1959-)는 “포크너는 전혀 마조히스트가 아니었다”며 이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는 자기 몫만큼의 고통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궁핍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을 마비시키는 자만심과 쾌락 추구와의 싸움을 의미했다. 포크너는 공포와 인생의 곤경과의 대결을 통해 싸워나감으로써 한 개인은 전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통을 보다 실용적인 자기계발과 연계시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심리학자 프랭크 맥컬리스터(Frank McAllister)는 “고통은 인간의 성장과 자기발전에 필요한 도전을 제공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안전욕구를 뒤흔들어버림으로써 성장할 수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극을 주지요. 우리가 편안하고 만족을 느낄 때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상실과 그에 따른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다 아름답고 좋은 말이긴 하지만, 너무 나가진 않는 게 좋겠다. 고통을 미화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1943-)은 “고통은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상투적인 말이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정신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다는 걸 안다. 인간의 모든 공동체 역시 굶주림이나 노예 상태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삶들이 그래서 의미가 있고, 고통이 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건 쓸데없는 일 같다.”
고통 예찬론과 긍정론
단지 쓸데없기만 하겠는가. 매우 이상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넷은 “19세기에 여러 성직자들이 빈민을 위해 쓴 소책자에서는 하루 14시간의 중노동을 ‘육체의 정욕과 열정을 길들이기 위해 주어진 축복’이라고 설명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어리석은 사고의 현대판은 흑인들이 싸워야 할 필요성 때문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태도이다. 마치 다수는 별 노력 없이 얻는 번듯한 삶이 무척이나 소중해서 소수는 이런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지옥 같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참한 신세를 축복으로 보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행복은 고통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심리상담 전문가 로리 애슈너(Laurie Ashner, 1955-)의 말이다. 그는 “고통으로 피투성이가 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고통을 받으면 속죄받으리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예전에는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행복 뒤에 고통이 따른다는 미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보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두려움과 자기의식이라는 불안 에너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제 실행할 수 없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한다.”
고통예찬론이나 고통긍정론보다는 오래 전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한 말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지나고 나면 고통은 기억 속에서 즐거운 것이 된다.” 그렇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보라. 재미있었다는 듯 말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그 시간들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게다.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사는 게 좋지, 고통을 예찬하거나 긍정할 필요는 없을 게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