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고독을 즐기려면 밑천이 필요하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고독은 이성에 위해를 가하며, 덕에 유익하지도 않다. 고독한 인간은 틀림없이 사치스럽고, 미신에 빠질 가능성이 높으며, 정신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말이다. 고독에 대한 최악의 평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고독을 고립이나 외로움의 의미로 쓴 경우도 있어 다소 주의가 필요하긴 하다. 특히 번역 과정을 거쳐야 하는 외국인들의 말은 더욱 그렇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홀로 있음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외로움’, 홀로 있음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시어스(David O. Sears)의 설명에 따르자면, ‘고독(solitude)’은 스스로 택한 ‘외로움(loneliness)’이다. 둘 다 홀로 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고독(loneliness)은 주관적 심리상태인 반면, solitude, aloneness, isolation 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객관적 상태를 의미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일부러 고립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독과 고립 사이엔 필연적인 연관은 없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으며,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대체적으론 고립돼 있을 때 고독을 느끼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고독의 ‘명암’
고독엔 명암(明暗)이 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잘 지적했듯이, “고독은 정신력을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사람을 우둔하고 고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존 버로우(John Burroughs, 1837-1921)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는 사람은 삶의 토대가 될 만한 사상과 경험의 밑천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빈곤하여 메말라버릴 것이다”고 했다.
사상과 경험의 충분한 밑천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고독을 예찬하기 마련이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행복의 최상은 바쁜 고독이다”고 했고, 오스트리아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오롯이 나 자신일 때, 완전히 혼자일 때 최고의 생각들이 가장 풍부하게 솟아난다”고 했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고독은 우리 안에서 독창성을, 낯설고 위험한 아름다움을, 시를 꽃피운다”고 했고,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깊은 고독 없이 진지한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디지털혁명은 고독을 향유하기 위한 밑천을 고갈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다. 미국 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 1948-)은 [외로워지는 사람들](2010)에서 “고독을 경험하려면 홀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로워지는 방법만 터득하게 될 뿐이다”고 했다. 사실 오늘날엔 고독을 경험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터클은 “인터넷에 길이 든 많은 이들은 호숫가나 해변 또는 등산길에서조차 고독을 찾을 수 없단 걸 깨닫는다”며 “정적(靜寂)은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2015)에선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고독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면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습관에 의해, 또한 끊임없이 공유하는 문화에 의해 고독은 궁지에 몰려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색과 고독
“소셜미디어와 함께 성장한 사람들은 ‘나’라는 느낌이 없다고 종종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포스팅이나 메시징이나 텍스팅을 하지 않으면 ‘나’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야말로 ‘나는 공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식의 세태다. 이런 세태에서는 남들이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는 활동을 근간으로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그래서 미국 IT 업계의 거물들이 다른 사람들에겐 자사 제품을 열심히 팔아먹으면서도 자신들의 어린 자식들에겐 IT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지게끔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굳이 고독을 껴안으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삶의 어떤 국면에서 사색을 위한 고독한 시간을 갖고 싶어도 그렇게 해본 경험이 없어서 고독을 전혀 느낄 수조차 없다면 이 어찌 비극이 아니랴.
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인 윌리엄 데레스비치(William Deresiewicz, 1964-)가 2009년 웨스트포인트 사관생도에게 한 연설에서 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는 “애덤스, 제퍼슨, 해밀턴, 매디슨 그리고 토머스 페인의 고독이 없었다면 오늘의 미국은 탄생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사관생도들이 나중에 장교로서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을 지휘할 때 필요한 리더십은 성찰적인 실천가가 되어야 함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선 혼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눌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꽤 그럴 듯한 주장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과 대화를 나눌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부터 자신과의 대화를 갖는 시간을 자주 가져보는 게 어떨까?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