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젊은이의 차이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2-09-04     신정일 객원기자

“젊은이와 노인의 차이는 젊은이는 언제나 삶을 바라보고, 노인은 죽음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젊은이가 짧은 과거와 긴 미래를 갖고 있는 데 비해 노인은 그 반대쪽에 있다. 늙으면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지만 젊었을 때에는 인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양자 중에서 어느 쪽이 위태로울까? 전체적으로 볼 때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하기보다 끝내버린 쪽이 낫지 않을까? 어쨌든 너무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원이다. 스페인에는 ‘목숨이 길면 재앙도 많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쇼펜하우어의 <나이에 대해서> 일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제 3막 5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 노인은 죽은 자처럼 느릿느릿 답답하고 창백하고 둔중하다.”

쇼펜하우어나 세익스피어가 살았던 그 당시의 노인들과 지금의 노인들은 분명 다르다. 예전과 달리 여러 형태로 노후가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나라에서 노인들에 복지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분명 예전과는 다르다. 하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삶과 죽음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도 분명히 있다. 호라티우스가 말한, “무슨 일에나 놀라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의 말대로 나이가 들면 모든 것들을 경험하였고 초월하였으므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 일 뿐, 세상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든 이들에게 그 초월성까지는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짓는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나라에서 파견되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고향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좋아함은 미혹이 아니겠는가. 또한 죽음을 싫어함은 마치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싫어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는 왔던 곳, 즉 고향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단 것을 먹고 아끼고 기른다 할지라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부드러운 옷을 입고 지키고 보호한다 하더라도 목숨은 반드시 마침이 있느니라.”

원효스님의 말이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왔던 곳으로 가고, 그리고 태어나는 데에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 살아 있는 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일까?

“인간들은 그들이 얼마나 ‘고결하게 사느냐’ 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만을 염려 한다. 고결하게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능력 안에 있지만, 오래 사는 것은 사람의 능력 안에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

그렇다. 다른 방법이 없다. 순간, 순간, 열심히 그리고 후회 없이 소신껏 살다가 돌아갈 것, 그것뿐이다. 잘 놀고 잘 살자.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