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가치
백승종의 역사칼럼
역사가로서 저는 가끔 묻습니다. 역사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요? 이름 있는 역사가들의 답변은 늘 심심하죠. 도움이 별로 안 됩니다. 그런데요, 미국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1924-87)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저는 볼드윈의 답변에 박수라도 치고 싶어져요. 역사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합니다. 그래서요, 역사의 운동장이 심하게 기울어 있으면 저는 가만히 참지 못하죠.
젊은 시절 동학에 관심을 가졌던 일, 중간에 서자(庶子)들의 사회적 성장에 주목한 일, 나중에는 <<정감록>>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민지식인의 활동을 제 나름으로 깊이 연구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근래에 괴태곶 봉수대의 문제나 억울하게 역적 취급을 받는 원균 장군의 문제에 주목한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위력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시민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의 시민은 그저 부화뇌동하지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만, 역사의 이용가치에 주목해서 그 가치를 조작하고 독점하려고 열을 올리는 집단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지난 역사를 왜곡합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해석을 전유(專有)하려는 욕심을 부립니다. 역사를 자기 손에 움켜쥐면, 현실을 수비게 장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신한 나머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을 깜깜한 암흑 속으로 유혹하는 사람들은 음험한 정치가들과 그들의 하수인입니다.
사극을 통해서 역사를 배우시나요? 드라마와 소설 등 대중매체를 빌려서 역사를 호흡하시나요. 이런 것들은 역사 교과서보다도 더욱더 위험한 선전물입니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 출발점은요, 한 가지 뚜렷한 인식에 있는 것 같아요.
볼드윈의 말처럼, 과거는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묘한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진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곧 하나의 '문화투쟁'입니다.
말씀드린 볼드윈의 한 마디가 가슴을 찌릅니다. "Not everything that is faced can be changed, but nothing can be changed until it is faced." 다 아시겠는데요, 직면한 모든 일이 다 바뀔 수는 없으나, 직면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진리가 담긴 말씀이 아닐까요.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