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영원한 해탈의 길'

이화구의 '생각 줍기'

2022-08-16     이화구 객원기자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고승 원효대사는 파계승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승가에 계실 때 불가의 수많은 경전을 섭렵한 뒤 확고한 윤리관을 제시하기 위하여 '계율해설서'를 저술한 사실을 아신다면 스님을 단순한 파계승으로 매도하는 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유명스님께서 말씀입니다. 비난하는 이유는 파계승으로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Outsider)였다는 것입니다. 

왕실불교와 귀족불교를 추구하던 당시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귀족불교의 가사를 벗어던지고 민중 속으로 내려가 중생구제를 해야 하는데 주류인 귀족불교에 머물면서 그게 가능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하라(상구보리하화중생 上求菩提下化衆生)”는 부처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은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비문을 보면 원효스님은 환속할 당시 가사를 고이 접어 부처님 전에 바치고 백팔 배로 참회하는 정상적인 환속의 과정을 거쳐 승가에서 나와 세월이 흐른 뒤에 결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파계라고 비난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과거 스님이셨다가 환속하여 결혼하신 시인 고은 선생님께 파계승이라고 비난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9세기 초 원효스님의 손자인 설중업(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고승으로부터 조부인 원효스님이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며 스님을 직접 뵙지 못한 것이 깊은 한(恨)이었는데 그 후손을 만나 기쁘다며 시를 지어준 사실이 삼국사기와 일본 역사서에 실려 있는 실존 인물)이 세운 서당화상(원효의 속명) 비석의 비문을 보면 스님께서 환속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적혀있습니다.

비문을 보면 “죽일 것 같은 활이 그를 향하였고,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이치에 맞지 않는 비난을 하자, 옛집으로 돌아와 거사가 되었다(赤弓向彼(적궁향피), 恒沙狂言(항사광언), □□還爲居士(환위거사)”라는 비문의 글귀를 보면 당시 귀족불교를 섬기던 시절에 원효스님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을 위한 민중불교를 주장하며 중생구제에 나서자 주류의 스님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멸시를 받았던 겁니다.

사실 귀족불교를 상징하는 거추장스러운 가사를 걸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중생구제를 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겁니다. 그래서 가사를 벗어던지고 중생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겁니다. 요즘으로 보면 왕따를 당한 셈입니다.

그래서 환속 이후 다시 큰 깨달음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다가, 소성(小性)도 과하다며 ‘아래 하(下)자’에서 위에 있는 ‘한일(一)자’ 마저 내버리고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면서 시중의 저자거리로 내려가 중생들과 가까이에서 대중설법과 불법포교로 한평생을 다하신 분입니다.

원효스님을 우리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학계에서도 이론이 없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이유는 방대한(150여권) 저술에 담긴 사상의 독창성에 있다는 점과 스님의 사상이 담긴 저작은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하니 그만큼 사상이 독창적이었다는 말씀일 겁니다.

원효스님께서 남긴 수많은 저술 중의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이 제일 유명하며 어렵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두 책을 모두 접해본 결과 어렵긴 해도 요점은 "열반에 이르면 열반에 머물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즉 깨달았으면 중생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 때문에 나 혼자만 편안히 열반에 머물 수 없어 다시 중생들의 삶으로 들어가 자비로운 마음을 베풀어 중생구제에 힘써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보살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의 많은 스님들 중에는 추종하는 제자들에 의해서 유명해진 스님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최소한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조선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았다가 중국과 일본에서 스님의 뛰어난 저작들을 보고 칭송을 해대니 그때서야 조선에서 알아주기 시작한 분입니다.

조선은 유학자들만 중국에 사대를 한 게 아니라, 스님들도 중국의 혜능스님하면 껌뻑 죽으며 유학자들 못지않게 사대를 다해왔는데 안타깝게도 육조 혜능스님이 저술했다는 '육조단경'도 혜능스님 사후에 스님의 추종자들이 만든 경전이라는 사실과 그 내용도 선불교의 교과서 격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연구결과가 30년 전에 이미 ‘존 매크래(연구논문 :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라는 학자에 의해서 밝혀졌는데도 지금까지도 조선의 유명 고승들은 혜능을 부처보다 더 신격화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혜능스님이 크게 깨달은 분이기는 하지만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스님 사후에 제자들이 혜능스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해서 육조단경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1500년 전 왕족이나 귀족이 주인인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주인이 되는 불국토를 꿈꾸며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 ‘자비’라는 사랑으로 중생구제에 앞장섰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것 같은 활이 그를 향하였고,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이치에 맞지 않는 비난을 하자, 옛집으로 돌아와 거사가 되었다”라는 서당화상 비문을 읽노라면 당시 주류세력들에 의한 비난의 화살이 얼마나 거셌겠는가를 생각하면 스님의 통한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2500여 년 전 부처가 ‘길(道, 부처는 룸비니동산 무수나무 아래서 태어났고, 원효는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서 태어남)’에서 태어나서 ‘길(道에서 걸식)’에서 살며 ‘길(道의 가름침)’을 설하다가 ‘길(道, 살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듯이 원효스님도 ‘중생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부처로 향하는 길’을 가르치다 ‘영원한 해탈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끝으로 저는 비록 현재 불교신자는 아니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 수많은 경전을 구입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 돌팔이 수준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헛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기가 불편하신 분들께서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글·사진=이화구(CPA 국제공인회계사·임실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