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내리지 못한 충의(忠義)의 깃발...윤희순
백승종의 '역사 칼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윤희순을 기억한다.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절대 있을 수 없다!” 그가 지은 <안사람 의병가>의 요지였다. 여성도 분연히 일어나 의병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윤희순은 무려 8편이나 되는 의병가를 지어, 충의지사(忠義之士)의 의기를 노래하였다.
그는 <경고문>도 4편을 썼다. 한편으로, 의병 진압에 나선 관군을 매섭게 질타하였고,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의병을 관가에 고발하는 가엾은 백성을 조용히 타이르기도 하였다. 또, 이웃나라를 유린하기에 여념이 없던 일본군들에게도 엄중한 도덕적 경고장을 보냈다.
윤희순은 행동하는 여사(女士)이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다시 일어났을 때였다. 그는 76명의 여성들에게서 군자금 355냥을 모았다. 놋쇠와 구리를 구입해, 그것으로 탄환을 만들어 의병들에게 제공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30여 명의 여성 동지자와 함께 의병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진정한 여장부가 아닌가. 그들 여성의병은 실전에 나갈 기회는 한 번도 얻지 못했으나, 의병대를 위해 밥을 짓고 의복을 세탁하는 등 허다한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모든 사물에는 뿌리와 줄기가 있는 법이란다. 윤희순은 이름난 선비집안에서 자라나서 청고(淸高) 개결(介潔)한 학자의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그의 시댁은 을미의병(1895년)부터 정미의병(1907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의병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화서 이항로의 고제(高弟) 성재 유중교는 윤희순의 시댁 조상이셨다.
시어른으로 말하면 의병장으로 활약한 외당 유홍석이요, 구한말 의병운동을 이끈 의암 유인석은 시댁의 숙항(叔行)이었다. 그의 배우자 유제원 역시 평생을 의병투쟁에 몸 바쳤다.
알다시피 유인석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국외에 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기에 부심하였다. 그는 5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08년의 일이었다.
이태 뒤 나라가 큰 불행을 당하자, 윤희순 가족 역시 서둘러 망명길에 올랐다.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이 먼저 북쪽 국경을 넘었다. 그 이듬해인 1911년에는 윤희순도 세 아들을 데리고 만주 땅으로 떠났다.
경술년을 전후해 만주 요녕성으로 이주한 의암 유인석의 친척과 문인들이 40가구를 웃돌았다. 구국의 일념에서 치열하게 피어났던 그들의 의병활동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새로운 불꽃으로 다시 점화될 것이었다. 윤희순은 궁핍한 망명자의 살림살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자금을 모아 항일운동에 힘을 보탰다.
1912년, 윤희순 일가는 이회영과 우병렬, 그리고 여러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환인현에 노학당이란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 학교는 장차 항일운동의 터전이 되기를 꿈꾸며, 50여 명의 애국투사를 쏟아냈다.
얼마 후 노학당이 폐교되자, 윤희순은 가족과 함께 무순으로 이주했다. 그때 거기서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힘을 합쳐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단 가족부대와 대한독립단학교도 잇따라 설립되었다.
대한독립단은 조선독립단이라고도 하는데, 자나 깨나 조선왕조의 부활을 소망하였다. 그 주역은 물론 구한말의 의병 출신이었다. 윤희순 일가를 포함해 유인석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중추적인 구성원이었다. 여기에 황해도 출신의 의병장 조맹선과 박장호, 그리고 평안도의 조병준과 전덕원이 거느린 의병들도 힘을 보탰다. 요컨대 대한독립단은 약 600명의 의병들이 대동단결한 것이었다.
그들은 남만주와 북만주는 물론 조국에 남아 있는 충의지사들과 연대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윤희순의 큰아들 유돈상은 이 단체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만주와 몽고에 흩어져 있는 친지와 동료를 규합하였고, 일부 중국인들의 후원까지 얻어 독립군을 길러낼 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은 낮이면 공부와 농사를 배웠고,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였다.
1928년, 유돈상은 일시 귀국해 군자금을 마련했다. 만주로 되돌아온 그는 조직을 재건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런 참척지변(慘慽之變)을 겪고서도 윤희순은 끝내 항일독립투쟁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