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의 품위
백승종의 '역사 칼럼'
1507년(중종 2) 10월 23일자 <<중종실록>>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시독관 최숙생이 발언이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소신(小臣)은 성종 때 경연관으로 항상 임금님을 곁에서 모셨습니다. 경연 때 임금님의 말씀이 친절하셨습니다. 신하들을 상대할 때는 늘 조용하고 온화하셔서, (왕과 신하들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았습니다. 신하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우러렀고, 위아래가 화목하였습니다.”
“그러나 폐주(연산군)는 달랐습니다. 경연에서 신하를 상대할 때 묵묵히 한 마디의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신하들이 (임금을) 승냥이나 범처럼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이라는) 화란禍亂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4책, 198쪽)
최숙생은 사림(士林)의 일원으로, 수년 뒤 개혁정치가 조광조에 나오자 그를 적극 지지한 선비였다. 그는 성리학적 이상주의자였던 셈인데, 그의 눈높이에 맞는 임금이 바로 성종이었다. 왕은 우유부단하기는 하였으나, 신하들과의 토론을 무척 즐겼다. 성종은 성리학이란 학문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주 신하들을 격려하며 그들의 학덕을 배우려고 애를 썼다.
자연히 조정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국가에 중요한 현안이 생기면 조정은 갑론을박으로 시끌벅적하였고, 그때마다 길고 긴 논쟁을 거쳐 어느 정도 합리적인 해결방법이 마련되었다. 그 시절에도 물론 정치구조상 신구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상당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화합을 강조하였으므로, 조정이 파탄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부왕과는 성향이 다른 정치가였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지리멸렬한 이론적 대립을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그는 경연을 싫어해 여차하면 핑계를 대고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경연에 참석하여도 연산군은 묵묵히 듣기만하였다. 왕은 자신의 속생각을 단 한 마디도 드러내지 않았고, 신하들이 국정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논의하는 장면을 보기 싫어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대간이 쓴소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왕에게는 대간의 논란이 한낱 형식이었고, 위선적이고 비생산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일국의 왕이 지식인의 토론을 회피하고 저주한다면 나라가 잘 될 리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식인 사회는 본래 말이 많은 것이 단점이기도 하지만 또, 매우 큰 장점이기도 하다. 정치가가 토론을 싫어하고, 비판을 저주한다면 나라의 장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의 연산군은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고육지계를 냈다. 왕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적당히 보장해주며 하루하루 향락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때로 말하면 국정의 쇄신이 필요한 시기였다. 조선왕조가 창건된지 어언 100년이 넘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폐단이 가시화되었던 시점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눈을 질끈 감고, 비판 여론을 억압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의 국정지지율은 형편없이 추락하였다. 왕을 지지하는 여론이 점차 사라져갔고, 종당에는 기득권층마저 연산군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누구라도 왕과 함께 하면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졌다. 결국에 연산군은 친위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다.
새로 뽑힌 윤석열 대통령은 연산군의 일을 먼 옛날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하루하루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데, 오불관언(吾不關焉) 즉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태도를 보이면 무엇이 좋아질 것인가. 그대 한 사람의 존망이야 우리들 시민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므로, 우리가 모두 걱정하고 있다. 품위 있는 대통령은 시민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고, 그 대신에 시민의 걱정을 자신이 가져가는 법이다. 정치가의 품위를 그대는 과연 알고 있을까.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