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백승종의 '역사 칼럼'
조선 후기에는 지식이 특정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교육받을 기회가 널리 확대되어, 창작과 독서를 비롯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 문화인이 여러 계층에 두루 존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근원은 바로 공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지식은 감히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실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알다시피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하는 공자의 말씀이 왜 중요한가. 유교의 한 갈래요, 조선의 국가 이념이던 성리학의 이상이 바로 군자가 되는 것인데, 그 길은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될 일이 아니라는 선언이라서 중요하다. 군자가 되고 못됨은 오로지 배움과 실천에 달린 문제였다. 타고난 신분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납득하지 못할 이가 많을 테니까 설명을 더 보탠다. 공자는 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유독 중궁(仲弓)이란 사람을 칭찬했다. 그런데 중궁의 가계에는 누구나 아는 흠결이 있었다. 그로 말하면, 신분제 사회에서는 크게 쓰일 수가 없는 딱한 처지였다. 공자는 이를 몹시 안타까이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비록 쓰지 않고자 해도 산천의 신들이 그냥 놔두겠는가?”
공자는 출신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공자는 중궁이 남면(南面)할 만하다고까지 극찬했다. 『논어』의 다른 곳에서 공자는 중궁이야말로 왕이 될 만하다는 인재라고 말하였으니, 공자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명백백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모두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였다. 그들이 공자의 뜻을 모를 리가 있었는가. 그래서 이른바 양반은 자신들의 세습적인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옛 신분질서를 고집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외를 인정하였다. 누구든지 재능이 탁월하고 인품이 고상한 이라면 세상이 그 선비의 능력에 알맞은 대접을 하자는데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다. 송익필, 이중호, 최립 그리고 이달 같은 선비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이었다.
일견 모순된 상황이었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바로 그러한 엇갈림 속에서 때로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고, 때로는 인습에 얽매여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비틀거림이었다. 조선의 서원과 서당 역시 한편으로는 순수한 배움의 장소이기도 했고, 때로는 양반의 집단적 이기심을 고집하는 제도적 무기로 악용되었다.
오늘날의 교육은 과연 어떠한가. 기득권층의 대물림을 위한 장치인가, 시민의 역량을 길러서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도량인가. 우리가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쥐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식인이라면 나의 이익을 떠나서 세상 걱정을 내 걱정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아, 이런 말조차 한가한 꼰대의 졸린 목소리로 치부되는 세상이라니, 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