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되는 변명

만언각비(17)

2020-06-23     이강록 기자
맹자

「맹자」에 나오는 얘기다. 어느 날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주나라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 칠십 리가 넘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했소?”

맹자가 답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선왕이 놀라서 물었다.

“설마 그렇게 컸을까요?”

맹자가 대답했다.

“그래도 당시 백성은 너무 작다고 불평했답니다.”

선왕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과인의 사냥터는 사방 사십 리인데도 너무 크다고 불평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소,”

맹자가 말했다.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 칠십 리지만 백성이 들어가 땔감을 하고 산토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문왕이 백성과 함께 사냥터를 쓰니 백성이 너무 작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떻습니까?”

맹자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처음 제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의 금령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왕의 사냥터에서는 백성은 땔감은커녕 풀도 벨 수 없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으며, 사슴을 잡으면 살인죄로 다스린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한다면 나라 안에 사방 사십 리나 되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백성이 너무 크다고 하는 것은 실정과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배운다. 사냥터의 크기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냥터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백성에게 부담스럽다면 크다고 느끼는 것이고, 부담스럽지 않다면 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뻔한 이치 아니겠는가.

맹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임금이 복지를 백성과 함께 누리라는 것, 바로 여민동락(與民同樂)이다. 왕조사회에서조차 그러했으니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나라의 통치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국민과 함께 아파해야 하고 국민과 똑같이 고통을 나눠가져야 한다. 한 회사의 대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회사의 사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 갖고 사원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 허나 현실은 딴 세상처럼 굴러가는 경우가 많다.

맹자의 가르침은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나라 회사 사주들은 어떤가. 어떤 사주의 사례를 보자.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사원들이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팍팍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지 조금도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저 ‘나 몰라라’식으로 일관한다. 진정으로 사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 회사와는 유리된, 자신만의 성채에 들어앉아 ‘홀로 아리랑’을 구가한다.

코로나19 쇼크로(사실은 코로나 쇼크 이전부터 회사매각 작업이 이뤄졌지만) 회사가 흔들리고 사원들이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든 말든, 실직 두려움에 몸져눕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신 있고 듬직한(?) 사주의 실상이다. 업계가 온통 어수선하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파탄 직전이다. 그럼에도 그 떵떵거리는 사주는 워낙 독보적인 존재이니만큼 강심장이어서일까. 문제의식조차 없다. “경영에 7년째 관여 안 하고 있다”라고 아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그에게 오성대감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오성의 마당에서 난 감나무가 옆집 정승의 담을 넘어갔다. 정승의 하인이 “담을 넘었으니 우리 것이군!” 하고 감을 똑 따갔다. 그걸 본 오성이 궁리를 하다 냅다 정승의 집 창호지에 주먹을 욱여넣었다. 창호지를 넘어온 주먹을 보고 깜짝 놀란 정승에게 오성이 태연하게 물었다.

“이 주먹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너 오성의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제 몸에서 나왔으니 제 주먹이지요. 같은 이치로 제 감나무에서 자란 감도 저의 것일 겁니다.”

이런 조언이 강심장 사주에게 너무 친절했을까 저어된다.

사주는 “당과 정부에서 일자리 경제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자신만만해 했던 장본인이다. 이런 사람이 21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며,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도 지냈다.

이스타항공 노조원들이 전주시내에서 지난 6월 19일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급기야 이스타항공 조종사 노조 위원장은 이렇게 호소한다. “경제전문가라고 자칭하면서 전북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공약을 내건 이상직 의원은 전북 인재를 포함한 1600여명의 이스타항공 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전북도민과 노동자를 기만한 이상직 의원을 단죄해달라.”

제나라 선왕은 제사에 쓰일 소가 우는 모습을 보고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했다. 맹자는 이런 선왕의 마음씨를 중요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왕에게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민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미루어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을 품을 수 있으리라고 본 거다.

그래서 왕도를 생각하는 사람(기업경영자도 일부분 같은 측면이 있다)은 연민의 마음씨를 지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딴판이다. 자기 집 강아지에게도 수십‧수백만원이 나가는 집을 사주는 세상인데 길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나 행려자들은 모르는 체하는 게 세상이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때 한솥밥을 먹던 사원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도 연민은커녕 눈 하나 깜빡 안하다니. 과연 회사의 사주로서 보여줄 태도일까.

우화라면 장자(莊子)를 능가할 사람이 없고 비유라면 맹자(孟子)를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장자와 맹자에게서라도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우리와 이웃들의 처지는 딱하기 짝이 없다.

물론 장자와 맹자의 가르침은 높다. 맹자께서 잊어달라고 하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장자께서 잊어달라고 하는 것은 인위(人爲)이다. 두 스승이 잊으라는 가르침은 서로 다르지만, 삶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편안하게 하라는 내용만큼은 같다.

회사의 대표라면 어때야 하겠는가. 불인을 잊는다면 사원들을 생각할 것이고 인위를 잊는다면 사원들의 어려움을 돌볼 것 아닌가.

장자는 ‘성망(誠忘)’이란 말을 남겼다.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것을 성망이라고 한다.

이상직 국회의원

성망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마는 누구보다 먼저 성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어느 분야건 최고책임자다. 한 개인의 성망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의 성망은 전체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 개인의 잘못이나 비극에 머물지 않고 온 조직원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최고의 책임자에게 참모나 비서를 수 십 명씩 붙여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책임자가 자기 위치를 못 찾고 헤맨다면 그 폐해와 손실은 누가 보상해주겠는가. 때문에 대표를 뽑을 때 국민들의 감식안이 밝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못했을 때 불이익은 고스란히 국민들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맹자가 제 선왕에게 말했다. “임금님의 신하 한 사람이 친구에게 처자식을 맡기고 초나라에 갔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보니 그의 처자식은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돼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지요.”

“만약 형벌을 관리하는 관리가 직책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면직시켜야지요.”

“그럼 한 나라의 정치가 매우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은 고개를 돌리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딴소리를 했다. 논리상으로는 왕도 바꿔야 한다는 답이 나와야 하는 대목이다. 그러니 왕이 딴청을 피울 수밖에.

이런 맹자속의 사례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우리 현실과 그리도 딱 들어맞는가. 회사 대표가 잘못하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체불 임금 달라는 근로자들의 요구에 ‘나는 모른다’하는 사주의 자세는 꼭 선왕의 딴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래 앉으면 새도 살을 맞는다고 했다. 이로운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마침내 화를 당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자리가 영원불후의 권좌가 아님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생각 있는 자의 자세다.

추월한강(秋月寒江)이라 했던가. 유덕한 사람의 ‘맑은 마음’은 정녕 이 세상에서 접해보기 어렵게 돼간다.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마음을 바라는 것부터가 무리일지 모르겠다. 아예 걸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만드는 것이겠기에 말이다.

“온 백성이 병들고 아프니 나도 병들고 아프다.”

유마힐(維摩詰)의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저릿저릿한 울림이 있다, 평범한 소시민의 가슴에도 와 닿는 이 말이 어찌 그 득의양양해 하는 ‘있는 자’ ‘가진 자’들에게는 안 들릴까. 도무지 모를 일이다. 세상의 역설과 부조리와 웃음거리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마는.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