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문화투쟁’이었다
백승종의 '역사칼럼'
동학운동은 이중, 삼중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투쟁’이었어요. 첫째, 서구의 충격으로 존망의 위기에 빠진 동아시아 각국의 자구적인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거지요.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동학은 주목할 가치가 있어요.
또 다른 측면도 있어요. 차별과 착취라고 하는 내적인 문제, 이것은 조선 사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지요. 이런 문제는 19세기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이자 서구 사회를 포함하여 전 지구적인 문제였어요. 인류의 역사상에는 항상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런 문제가 남아 있고요. 이런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한 동아시아의 해답이 바로 동학운동이었어요. 저는 이를 ‘동아시아의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동학은 동아시아 문화에 공통적인 종교, 철학적 기반 위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화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잖아요. 유교와 불교와 도교는 한국의 문화이기도 했으나, 동아시아 전반의 보편문화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스스로 찾아낸 해결책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라고 하겠어요.
세 번째로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만, 서구의 근대는 제국주의적 근대였다고 하겠는데요. 그에 비해서 동아시아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은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는 근대화였다는 점입니다.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동학은 탈인간중심이었다고 말해도 좋겠어요.
동학이 인간중심이 아니라는 점은 최시형이 설파한 ‘삼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요. 요컨대 동학은 생태중심의 사고였어요. 지극히 존귀한 인간도 지구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착취의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동학은 인류 문제의 생태적 해결을 촉구했다고 보고 싶어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은 대단히 특별한 사상이었어요. 저는 그 점을 한마디로,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절실한 노력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우리가 동학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리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 권력과의 불행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894년에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씀이지요.
그때 전봉준 등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이념적으로만, 종교적으로만 풀려고 하면 절대 안 풀린다는 판단을 했어요. 현실적인 운동, 하나의 조직적인 실천 운동을 하였다는 말예요. 그때 그 운동이 어떻게 조직됐는지, 운동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시점에서 앞에서 짤막하게 언급한 마을공동체의 협동조직이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등의 문제도 우리는 밀도 있게 검토하여야겠습니다.
동학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생태 중심의 재편하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없는 큰 사업이지요.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