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를 유람하며 유유자적 사는 삶

신정일의 '길따라 인생따라'

2020-06-19     신정일 객원기자

오랜 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이 내게 건네는 말이 있다.

“선생님, 부럽습니다. 언제 시간 내서 따라다니겠습니다.”

대개 사회 지도층 사람들이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 말들이 그냥 ‘입에 바른 소리’ 까지는 아니고, 그러고 싶은데 할 수 없기 때문에 건네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사치레로 건넨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토록 바쁜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시간을 내서 나 같이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쏘다니는 곳을 따라서 다니겠는가? 

많은 사람 먹여 살려야지, 나라에 충성해야지,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노심초사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사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그리워도, 보고 싶어도 시간을 내지 못하는 그들이 그처럼 한가하다면 한가하고 게으르다면 게으른 그런 시간을 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일 노는 것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나의 삶 같지도 않은 ‘이런 삶’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어떤 선비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밤이면 밤마다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성의를 다하자, 하루 저녁에 갑자기 공중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상제(上帝)께서 너의 성의를 아시고 나로 하여금 네가 원하는 바를 물어오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선비가 하는 대답. 

“제가 원하는 것은 매우 작은 것입니다. 감히 너무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생은 의식(衣食)이나 조금 넉넉하여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유유자적하다가 죽었으면 만족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 공중에서 크게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 그것은 천상계(天上界) 신선(神仙)들이 즐기는 낙(樂)인데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일 부귀(富貴)를 구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빈천(貧賤)한 사람은 굶주림과 한파( 기한.飢寒)에 울부짖고, 부귀한 사람은 또 명리(名利)에 분주하여 종신토록 거기에 골몰한다. 

생각해보건대, 의식이 조금 넉넉하여 아름다운 산수 사이를 유람하며, 유유자적하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극락(極樂)이건만, 하늘(天公)이 매우 아끼는 바이기에 사람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필문규두(蓽門圭竇, 사립문과 문 옆의 작은 출입구, 가난한 집을 뜻함)에 도시락 밥 한 그릇 먹고 표주박 물 한 잔 마시고서, 고요히 방안에 앉아 천고(千古)의 어진 사람들을 벗으로 삼는다면, 그 낙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어찌 반드시 낙이 산수사이에만 있겠는가.“ 

'금뢰자'(金罍子)에 실린 내용이다.

산천이 아름답고 청명한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과 정을 나누며, 조촐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틈 날 때마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것을 실천하면서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하는 삶을 옛 사람들은 신선의 삶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저런 조건을 붙여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떠나고 싶어도, 행여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월을 보내고 난 뒤에야 ‘내 이럴 줄 알았다.’ 하고 후회하며 땅을 치지만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간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내 삶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 저마다 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잘 산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없이 잘 못 산 것 같기도 한 것이 나의 삶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살아온 대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조금 더 열심히, 이 세상을 떠돌고 떠돌면서 살다가 길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은(길을 좋아한 사람들의 가장 숭고한 꿈인 객사(客死)) 나의 삶, 그것이 나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전북 장수 와룡휴양림에서.

/글ㆍ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