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조직의 역사와 시민단체
백승종의 '역사칼럼'
조선후기 우리나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밀결사가 활동했어요. 그들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 조직을 운영한 경험이 최제우에게 전달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최제우는 바로 그런 전통 위에서 결코 부서지지 않을 단단한 조직을 설계했다고 믿어요.
그것이 바로 ‘포’요, ‘접’이었던 것입니다. 하루하루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옛 조직을 재건할 수도 있는 점조직이었어요. 깨지지 않는 인간의 강인의 고리로써 보이지 않는 성을 쌓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동학을 위대한 교단으로 키운 포접제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조직이 정말 제대로 작동했다는 사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동학의 제2대 교조 최시형의 삶이었어요. 최시형이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여러 지역에서도 동학 조직은 튼튼하게 유지되었어요. 훗날 교조신원운동을 하자며 최시형을 찾아간 서인주, 서병학 등의 예를 보아도 먼 남쪽에서도 동학 조직은 훌륭하게 살아있었어요.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동학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에서도 상당한 호응이 있었습니다. 서북쪽에도 상당히 튼튼한 동학 조직이 있었던 것입니다. 형편상 최시형이 직접 개입해서 조직을 만들 수가 없었던 곳에서도 포접제는 훌륭하게 운영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런 점에서, 동학의 포접제는 전통적인 비밀결사의 전통 위에서 운영되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지는 거지요. 19세기 중후반, 한국사회에서 포접제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포접제는 남부지방에서 특히 큰 위력을 발휘했어요. 그것은 현지의 농민조직인 두레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마을의 공동체 조직과 포접제가 일정한 함수관계에 있었다고 봅니다.
동학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사회에 존재한 유형무형의 전통과 깊은 관계가 있어요. 특히 정감록 계통의 비밀결사와 농민조직인 두레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구태여 비밀조직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다양한 조직을 만들고, 정부와 사법부 및 입법부를 철저히 감시하고 채찍질할 때입니다. 그래야만 민주적인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단체에 좀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시기를 촉구합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