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만나고 길에서 나를 만나고
신정일의 '길 위에서'
하루나 이틀을 또는 사나흘을 꼬박 걷다가 못걷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코로나가 시작 된 뒤 부터였지. 아직도 이 나라를 며칠씩 걸어갈 길, 며칠씩 걸어갈 수 있는 미지의 길이 남아 있는데, 걷지를 못하다 보니 어딘가 몸이 자꾸 고장이 난 느낌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걷는다‘는 그 행위가 중독을 넘어서서 미쳐 버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끊을 수 없는 장거리 걷기의 유혹, 장거리 도보답사에서 느끼는 고통이 만만치도 않은데, 한 걸음도 걷기가 싫을 때도 있는데, 그리고 밤에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어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는데, 아침이 되면 다시 걷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을 부여하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과 이처럼 다시 그 길에 서고자 하는 욕망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하루에 최소한 네 시간동안, 대개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일체의 근심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린 채 숲으로 산으로 들로 한가로이 걷지 않으면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유지 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나는 단 하루라도 밖에 나가지 않은 채 방구석에만 쳐박혀 지내면 녹이 슬어버리고 오후 4시(그 하루를 구해내기에는 너무도 늦은 시간)가 훨씬 넘어서, 그러니까 벌써 밤의 그림자가 낮의 빛 속에 섞여들기 시작하는 시간에야 비로소 자리를 비울 수 있게 되면 고해성사가 필요한 죄라도 지은 기분이 된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여러 주일, 여러 달, 아니 사실상 여러 해 동안 상점이나 사무실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내 이웃 사람들의 참을성, 혹은 정신적 무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에 실린 글이다. 소로의 글에서도 드러나지만 ‘걷는다.’는 그 사실이 우리들에게 주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 걷기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사물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내가 나를 만나고, 내가 사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경이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실타래처럼 엉킨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다시 긍정적으로 설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사실 자체만으로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에서 유용하며 그래서 걸어볼만하고 세상이 얼마나 살아볼만한가를 느끼게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에서 다시 새로운 길에 접어드는 것이며, 길에서 길을 만나게 되고 길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길 위에 서야 하는데, 언제쯤 마스크 벗고 마음 놓고 길위에 설 수 있을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