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선생과 영랑 시인을 모두 만나려거든 지금 당장 강진으로...
전남 강진 기행기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져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 김윤식-
지금 강진에 가면 형형색색 꽃망울 터트린 모란꽃들이 '활짝'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유미적·낭만적·탐미적 성격의 대표적 자유·서정시로 유명하다. 모란의 개화와 낙화를 소재로 하여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수미상관식 구성을 취해 주제를 강조하는 이 시는 부드러운 시어와 역설적 표현이 특징으로 꼽힌다.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연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 생가'에 모란꽃이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란 시구가 절로 입안에서 맴돌게 할 정도다.
우리나라 대표적 서정시인이자 민족운동가인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1903~1950) 선생의 강진 생가에 모란꽃이 형형색색의 모습을 자랑하며 화사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영랑 시인 숨결 동시에 마주할 수 있는 곳
지난 20일 강진에서 다산의 가르침을 새기고 영랑의 시를 음미할 수 있었다. 항상 느끼게 되지만 강진을 오게 되면 볼거리와 먹거리가 다양하다.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꼭 가야할 곳이 있다.
모란꽃이 절정인 영랑 시인의 생가와 함께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유배시절 머물었던 사의재(四宜齋)는 언제 찾아도 새롭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강진군에서 나름대로 다산 유적지 등 문화에 대해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사의재에서 영랑 생가에 이르는 골목에 다산 유배지에 대한 안내와 시기별 다산의 일대기를 적어 놓은 것은 신선하다.
다산이 머물던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 마땅히 해야할 것은?
사의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던 주막집이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 10월 26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했다.
대지 면적이 1,156㎡에 주막채·바깥채·초정(草亭) 등으로 이루어졌다. 강진군에서 위탁한 문화해설사들 주막을 운영하면서 문화관광 해설도 제공한다. 300여m 거리에 시인 영랑의 생가가 있다.
시어가 절로 떠오르게 하는 영랑 생가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김영랑(金永郞, 1903∼1950) 시인의 생가는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어(詩語)가 되는 모란꽃밭이 조성돼 있어 해마다 이맘때면 장관을 이룬다.
생가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고 기록돼 있다. 생가의 본채 건립 시기가 1900년대 초반 임을 알 수 있다. 영랑 시인의 생가는 독특하게 옆으로 길게 조성돼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했다.
난간을 마주하고 안상형(眼象形) 궁창(문의 하부에 낮게 끼워 댄 널)을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자(亞字)살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영랑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1903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박용철(朴龍喆) 등과 교류하면서 최초로 '시문학' 동인지를 만들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했다.
현대문학의 거성...체취 느낄 수 있는 공간
영랑은 일제 치하에서 설움 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에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옥은 건축적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영랑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는다.
이 곳 모란꽃들은 강진군이 지난 1992년 영랑의 생가 복원 과정에서 화단과 뒤뜰 등에 심었다고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시인의 생가는 영랑의 시심(詩心)을 느끼고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인파들이 모여든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는 많은 관광지와 음식점들이 있지만 어딜 가도 고즈넉하고 음식 맛도 아주 좋다.
특히 모란꽃이 피는 4월 중순을 전후해 이곳은 '남도 답사 1번지'로 손꼽힌다. 그 중 영랑의 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됐으나 강진군이 1985년 12월 매입, 1986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됐다.
영랑 생가에서 시인의 숨결을 느낀 후 나와 다시 사의재를 지나면서 다산 선생과 작별 인사를 했다. 대문에 활짝 핀 등나무꽃이 발길을 다시 붙잡는다.
'사의'는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새기고 새길수록 새롭다.
첫째, 생각을 맑게 하라.
둘째, 용모를 장중하게 하라.
셋째, 말을 과묵하게 하라.
넷째, 몸 동작은 무겁게 하라.
/글·사진=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