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名士)'의 신용 범위가 고작?
신정일의 '길따라 인생따라'
솔찬이 오래 전 일이다. 1999년 12월 24일쯤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가 오고 있었다. 한 세기가 다른 세기로 전이해가는 세기 말인데도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때까지 나는 겨우 한 권의 책을 냈을 뿐이라서 작가이기 이전에 문화운동가로 살아왔고, 어디에도 소속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월급(33개월 15일 군 생활을 하고 제대하면서 받은 마지막 병장 월급 2,400원 받음)을 받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외롭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어디다 하소연 할 데가 없는 막막한 고독과 쓸쓸함을 견디며 살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999년 12월 말 무렵이었다.
밀레니엄이니 뭐니 해서 국내외가 다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전주의 모 방송국에서 세기가 바뀌는 2000년 자정 12시에 ‘명사의 한 마디’ 시간을 마련했다고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나는 명사가 아니지 않느냐’고 사양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명사이고 이 프로그램에 가장 적임자라며 인터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음 날 녹화를 하기로 해서 했다.
그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온 아내가 친정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곳, 저곳 보증을 서주었더니, 천만 원을 갚으라는 통보가 와서 아무래도 친정에서 빌려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호기 있게, 오랫동안 황토현문화연구소로 거래를 했던 은행에서 빌려보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방송국 녹화를 마치고 은행에 갔다, 여차여차 해서 대출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자, 통장을 달라는 것이었다. 통장을 주자, 확인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보증인을 세워서 ‘카드론‘으로 이백만 원을 대출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내가 이 은행에 거래 한 햇수가 십오륙 년이 되고 내 딴에는 많은 돈을 거래 해왔는데, 아무래도 기계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 번 부탁했더니,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삶을 살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었는가 하는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80년대 초에 제주도에서 전주로 나와 그때까지 20여 년에 걸쳐 문화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명색이 이 지역에서는 명사(名士)라고 소문이 나서 세기 말에 모방송국에서 명사(?)라는 이름으로 인터뷰도 했다, 그래서 천만 원 대출을 받고자 했는데, 천만 원은커녕 보증인을 세워서 기껏 이백만 원, 그것도 카드론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신정일이라는 사람의 본 모습이었던가?
의대만 졸업하면 1~2억을 대출해주고 공무원만 되면 보증인을 세우지 않아도 몇 천만 원씩 대출을 해주는 시대에 명사의 신용범위가 고작 2백만 원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은행을 나와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보니 내가 어찌나 초라해지던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가자 아내가 내게 물었다.
“대출은 어떻게 잘 되었어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자네 참 위대한 사람이네. 무보증으로 이천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 안 됐어, 나는 이백 만원 밖에 안 된다네. ”
“돈에는 돈 이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러시아 속담은 얼마나 지당한 말인가? 돈 앞에 알량한 지식이나 지혜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가?
돈의 비밀을 갈파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기도 하지만 돈만 많이 있으면 세상에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난리가 아니다.
“돈은 누군가를 묻지 않고 그 소유자에게 권리를 준다.” 는 러스킨의 말은 대체로 맞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한 번도 돈을 우위優位에 둔 삶을 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사고 그 다음에는 옷을 사 입는다.“는 에라스무스의 말을 경구처럼 여기고 살고 있으면서도 옷을 사는데는 지금도 인색하다, 그런데도 돈에서 자유롭지 않을 때가 더러 있어서 그것이 가끔씩 나를 슬프게 한다.
‘언제쯤 지금보다 더 돈에 대해서 초연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인데, 그러다가 ‘사람은 내일을 기다리다가 그 내일엔 묘지로 간다’는 속담을 되뇌며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지.
※후일담 :
그 뒤부터 가난하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그 누구에게서도 보증을 서달라거가나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한 번도 받지 않았음.
/글ㆍ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