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어머니와 그런 에미

만언각비(15)

2020-06-11     이강록 기자

“세상 사람들은 항상 과부의 자식은 교양 없다 비방하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비평을 면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매양 이렇게 타일렀다.

“사람들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아이를 별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고 다리를 뻗고 앉거나 기대거나 눕거나 엎드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평상시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 어머니가 누구인가. 바로 퇴계 이황의 어머니 춘천박씨다. 위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퇴계의 아버지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당시 퇴계는 7개월을 막 넘긴 갓난아기였다. 어머니 춘천 박씨는 33세였다. 그래서 퇴계는 어머니의 가르침 속에 자라났다.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하면서 성장했다.

춘천박씨는 고난의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영광의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32세에 청상(靑孀)이 돼 전실(前室) 아이 넷을 보탠 8남매를 혼자 길러 성장시키느라 고생은 막심했다. 그러나 온계(溫溪: 퇴계의 둘째형 이해)나 퇴계와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의 보람은 어땠을까?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녀는 더욱 맘을 다져 농사일과 양잠일에 힘을 썼다. 옛살림을 줄이지 않았고, 여러 아들들을 서당에 취학시켜 글을 배우게 했다. 특히 행실을 중히 여겨 자세를 바르게 가지도록 인성교육에 치중했다고 한다.

“무릇 문예(지식)만 치중 말고 몸가짐과 행실(윤리적인 삶)에 주의를 기울여라.”

퇴계연보에는 어머니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퇴계는 6세 전후에 이미 밤중에 어른이 부르면 뻘떡 일어나곤 했다. 어머니 가르침이 퇴계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데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했다고 한다. 글공부나 과거급제를 단순히 출세로 보지 않고 인간됨됨이의 길로 보았던 것. 실제로 퇴계는 사마시(司馬試) 이후 과거에 큰 뜻을 두지 않아 32세에 형의 권고로 늦게 과거에 나갔다.

퇴계는 어머니의 훈도를 가슴에 깊이 새긴 그런 어머니의 그런 아들이었다. 글자를 익힌 적이 없는 어머니였지만,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조용히 훈도하는 그런 교육자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만 되새김질하여 자녀들에게 실천토록 지도한 내면의 교육자였다. 그 교육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에 있었고, 또한 그 실천을 중시했다.

후일 벼슬자리에 오른 퇴계는 말했다.

“나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은 어머니셨어요.”

그런데 퇴계가 몸소 쓴 어머니 묘갈문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어머니는 문자를 모르셨다.”

자식들이 커가는 내내 글을 전혀 읽은 적이 없는 어머니의 초췌한 가슴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로비에 게시된 퇴계선생 친필 현판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 있다. ‘인십기천(人十己千)’

남이 열을 노력하면 나는 천을 노력한다는 뜻이다.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퇴계가 이 글귀를 유달리 명심했던 것은 남보다 백배 노력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어서 일까.

퇴계의 어머니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교육여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계의 전문가들은 “퇴계 이황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은 평범한 어머니로 퇴계 형제들의 교육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을 닦게 했다”며 “이는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교육의 표상이었다”고 강조했다.

퇴계의 어머니는 보통 어머니였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의지와 겸양으로 자식을 잘 기르려는 보통 어머니였다. 자식자랑은 전연 내색하기를 싫어하던 평범하지만 전형적인 한국의 보통 어머니 모습, 그것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어머니는 더욱 위대하게 보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계모에 의해 7시간가량 여행용 가방에 갇혔던 9세 남자아이가 결국 숨졌다. 작은 가방 속에 갇혀 꽃처럼 피어나야할 어린 목숨이 꺾이고 말았다. 가로 44㎝ 세로 60㎝ 가방, 이게 아홉 살짜리 아이가 마지막 숨을 헐떡였을 공간이다. 라면 박스보다 조금 큰 그 가방 속에서 아이는 얼마나 숨 막혔을까. 숨져간 아이는 몸무게 25kg 남짓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다.

이 가방 속에 가둔 이유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훈육이었다니. 그것도 엄마의 명령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말문이 막힌다. 아무리 의붓자식이라도 그렇게 가둔 계모는 어미가 아니란 말인가. 의붓어미는 이토록 무서워야 하는가.

“고개도 못 들었겠구나. 숨도 쉬기 어려웠겠구나. 발목은 접히고 무릎도 못 폈겠구나.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어댈수록 자꾸만 더 선명히 그려지는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짧았던 아이의 생 속에서 아이가 겪었던 세상은 어땠을까?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고통의 끝을 만났을까? 이 사회는 어쩌다 이렇게 아이들을...”(서지현)

그 좁은 가방 속에서 꼼짝도 못한 채 죽어간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아! 인간은 어찌 이리도 잔인한가. 그런 학대 끝의 결과적 살인도 훈육의 방법이라 핑계댈 수 있을까. 몰인정을 넘어서 잔악하고 표독하다. 인두겁을 쓴 존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어미도 어미라고 할 수 있나. 통재라! ‘그런 에미’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