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의 우정
백승종의 '역사칼럼'
1.
어제(2022. 2. 8)는 경남 창녕에 다녀왔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낙동강이 큰 고통을 받고 있어서 그 문제로 회의가 열린 거였습니다. 그 회의를 주관한 것은요, 낙동강 연안의 신경제를 꿈꾸는 ‘낙동계’라는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주요 일꾼 가운데 창녕의 고가(古家)인 창녕성씨 자손이 한 분 계시고, 바로 그분이 저를 회의에 불렀습니다.
<낙동강, 영남의 ‘오래된 미래’> 어제 회의에서 제가 발제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낙동강이 있었기에 영남의 독특하고 풍요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낙동강 연안의 문화적 전통을 잘 지켜야 한다.’ ‘전통문화를 박제하지 말고 서원도 고택도 우리가 함께 모여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으로 삼자. 이것이 낙동강의 문화적 터전을 후세에 물려주는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2.
창녕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선비가 생각났습니다. 19세기 한양에 살던 성재원(成載瑗)이란 분이었지요. 그분이 살기는 한양에 살았으나 그 집안은 창녕에서 출발한, 창녕성씨였어요. 선비 성재원은 저의 6대조인 백동량(호는 풍암) 공과 가까운 사이였답니다. 성 선비는 전주에 살던 벗인 풍암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듣고 슬픈 마음에 애도의 글을 지었습니다. <만시(輓詩)>였지요. 원문과 함께 제가 번역한 글을 올려둡니다.
3.
秋風瑟瑟掩荊門 子訃來時欲斷魂 隣笛凄凉餘舊友 庭蘭濃郁見諸孫 傳家早服黔婁行 傲世皆知仲統論 千里江南芳草遠 漬綿無路獨沾巾
가을바람도 스산하여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지요.
뜻밖에 들려온 공의 부음 소식 한번 듣자 넋을 잃었습니다.
이웃집의 피리 소리도 처량도 한데, 공의 여음(餘音)만 같습니다.
뜨락의 짙은 난초 향기는 공의 손자들도 같고요.
공은 일찍이 집안의 전통을 따라 노(魯) 나라의 숨은 선비 검루의 행실을 배우셨지요.
세속을 가벼이 여기시고 은사의 문학(‘중장통론’)에 통달하셨습니다.
머나먼 천릿길 강남에는 공이 남기신 향기 아득하기만 합니다.
영전에 한잔 술과 안주를 바칠 길 없어 홀로 눈시울만 적시고 있지요.
4.
사랑하는 벗의 부음을 듣고도 선비 성재원 공은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 영전에 조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에는 한양에서 전주까지 가자면 족히 엿새쯤 걸렸으니까요. 그러나 애도의 마음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부음에 넋을 잃다시피 하였고,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도 벗의 음성을 떠올릴 정도였으니까요. 옛 선비의 우정이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성 선비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비롯해 조정의 요직을 두루 지낸 분이었어요. 이조참판을 거쳐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보다 일찍 별세한 저의 6대조는 성 선비보다는 나이도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는, 사후에 곧 효자로서 정표(旌表)를 받았고 교관(조봉대부)에 추증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선비는 출신 지역에 구애되지도 않았고, 벼슬의 높고 낮음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나이에도 구애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제 저는 창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옛 선비의 깊고도 은은한 우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어두운 차창 밖을 내다보며 연신 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