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증후군
백승종의 '역사칼럼'
홍길동(洪吉童 또는 吉同, ?-1500)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로라면 그는 연산군 때 충청도를 무대로 날뛴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1500년(연산군 6) 12월 29일자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충청도 일대에는 홍길동에게 협력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다수의 권농(勸農)과 이정(里正)들이 그러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진두지휘한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1434-1502)이 연산군에게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강도 홍길동(洪吉同)은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을 하였고 첨지(僉知)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그는 대낮에도 무리를 거느리고 무기를 소지한 채 관청에 드나들며 멋대로 굴었습니다. 각 고을의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은 물론이고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그 사정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도 그를 체포하거나 고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홍길동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멋대로 각 고을의 재물을 탈취하였으나, 조정도 지방 관아도 속수무책이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홍길동의 세력이 막강하였다. 그러나 누군가 밀고를 했든가, 아니면 조정의 어떤 계략에 넘어갔는지, “강도 홍길동”이 관헌에 생포되었다. 1500년(연산5) 10월 중순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그를 철저히 국문(鞠問)하였다. 그럼 그 뒤 홍길동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따로 기록된 것은 없지만, 사형을 당했으리라 본다. 당시 홍길동 사건을 바라보는 조정의 태도가 매우 엄했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당상관의 벼슬에 있던 무신(武臣) 엄귀손(嚴貴孫, ?-1500)의 연루설이 불거졌다. 홍길동은 엄귀손을 자신의 “와주(窩主)” 즉, 도둑의 뒤를 돌봐준 우두머리라고 진술하였다. 이것은 사실이었을까.
알고 보면 엄귀손에게 의심스런 점이 있었다. 조사를 마친 영의정 한치형(韓致亨)과 좌의정 성준(成俊, 1436-1504) 그리고 우의정 이극균(李克均, 1437-1504) 등 삼정승은 연산군에게 엄귀손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오랜 관직 생활에서 엄귀손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특히 재물과 여색에 관한 그의 탐욕은 세인의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그는 본래 가난한 무사였으나, 1500년에 조사를 받을 당시 그의 재산은 놀랍게 불어나 있었다. 서울과 지방에 집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3∼4천 석이나 되는 많은 곡식을 보유하였다.
대신들은 엄귀손이 강도 홍길동과 내통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연산군 역시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엄귀손에 대한 취조를 철저히 하라고 명했다. 그해 12월, 엄귀손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혐의사실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채 평생 애써 모은 전 재산을 국가에 빼앗겼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1500) 11-12월 기사를 참조).
홍길동 사건이 마무리 된 뒤 충청도 일대에 후폭풍이 거세게 불었다. 영의정 한치형은 홍길동과 내통한 이정과 권농 등 충청도의 토착세력을 처벌하자고 하였다. 연산군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충청도 인사가 함경도와 평안도 등 변방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런 때문인지 평안도 일대에는 20세기까지도 충청도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민족 시인으로 손꼽힌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은 공주 김씨였고, 정주지방 유지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집안으로 홍주(현 홍성) 김씨도 있었다.
홍길동 사건이 마무리된 지 13년이 지나도록 충청도 일대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중종 8년(1513) 8월 29일에 호조(戶曹)는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홍길동 사건 이후 충청도에서는 많은 사람이 유망(流亡)하여 양전(量田)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충청도에서는 제대로 세(稅)를 거두기도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중종실록>>)
홍길동의 일파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강제이주를 당했고, 누군가는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10년 넘게 고향을 등진 채 귀향을 저울질하였다. 홍길동이란 이름은 오래도록 조선사회에서 금기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서도(西道)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 중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장사꾼들의 맹세하는 구호(口號)에까지 들어 있다.”
이익이 홍길동을 “서도” 즉, 황해도와 평안도를 주름잡은 도적이라고 쓴 것은 틀렸다. 그러나 18세기까지도 홍길동의 유명세가 대단하였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후세 사람들은 도적 홍길동을 민중의 영웅으로 되살려냈다. 옛 소설 <<홍길동전>>이 대표적인데 통설에 따르면 그 저자는 허균(許筠, 1569-1618)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명문 양반의 후예였고 대신까지 역임한 허균이 홍길동 같은 강도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며 소설을 썼다는 것은, 이치로 보나 시대상황으로 보나 도무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다.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소설 <<홍길동전>>은 일종의 집단창작이었고, 그것이 조선사회에 등장한 것도 성호 이익의 세대가 사라진 다음, 곧 18세기 말 이후였다고 본다.
※출처: 백승종, <<역설. 백승종의 한국사 에세이>>, 산처럼, 2013.
사족: 2008년에는 현대판 홍길동이 등장하였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기억하지 모르겠다. 그때 많은 시민이 그를 홍길동에 비겼다. “기는 (강)만수 위에 뛰는 백수 (미네르바)”라는 말이 나돌았다. 강만수는 그 당시 최고급 경제관료였고, 미네르바는 무직자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미네르바’ 박대성 씨의 경제 분석력은 탁월했다. 2008년 7월, 그는 인터넷 포털인 <다음>의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글을 게시하기 시작하였다. 놀랍게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곧 대한민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정확히 진단했고, 미국 월가를 이끄는 ‘리먼 브라더스’가 몰락한다는 점을 정확히 예언하였다.
미네르바는 환율변동과 주가지수의 급락을 점치는 100여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 상당부분이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추적60분> 등 주요 방송매체도 그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자 아연실색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2월 29일, 허위사실유포 죄를 적용해 미네르바를 체포했다.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가게 되었는데, 2011년 1월 4일에 무죄가 확정되었다.
시민들이 ‘미네르바’에 열광한 현상은, 일종의 홍길동 증후군 같은 것이었다. 역사적 인물 홍길동은 의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민중은 출구가 막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홍길동이란 이름에 담았다.
한달 뒤에 있을 제20대 대통령 선거도 새로운 ‘홍길동 찾기’인 것 같다. 한국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각종 진입 장벽을 과감하게 제거할 이는 누구일까.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유능한 정치가를 우리는 발견해야한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