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땅에 열리는 까닭은?
만언각비(13)
인도 우화 가운데 ‘호박이 땅에 열리는 까닭’이란 게 있다.
매사에 불만이 많은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호두나무 아래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 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는 호박넝쿨을 보고 중얼거렸다.
“신이여, 이렇게 큰 나무에 저리도 작은 호두열매를 맺게 하시고 이처럼 연약한 덩굴에는 이다지도 큰 호박을 열게 하시다니요.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시나요? 만일 호박을 저 큰나무에 열게 하고 호두를 저 덩굴에 맺게 하신다면 그때부터는 저도 당신의 위대함을 믿겠습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두 한 알이 그 남자의 머리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그 남자가 외쳤다.
“오, 신이시여, 당신의 생각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지금 제 얼굴에 호박이 떨어졌다면 저는 지금 즉사하고 말았을 테지요. 당신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이옥순, 인도우화집 ‘인생은 어떻게 역전되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제 자리’가 있다. 모두가 그리 된 까닭이 있다. 우화에서처럼 호두는 호두의 자리, 호박은 호박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해와 달도 모두 저마다의 자리가 있다. 샛별은 샛별의 자리, 북두성은 북두성의 자리에서 빛나야 한다. 그만큼 제 자리가 중요하다. 그들이 각기 제자리를 지킬 때 자연과 우주는 정연한 운행칙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미처 그것을 모를 따름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의 자리가 흐트러져 콩켸팥켸가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진다.
세상 만물은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다. 저마다 존재방식이 다르다. 꽃은 꽃다워야 하고 나무는 나무다워야 한다. 호랑이는 호랑이다워야 하고 고양이는 고양이다워야 한다. 꽃이 꽃답지 않을 때 그 꽃은 아름다울 수 없다. 야성을 잃고 풀을 먹는 호랑이나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를 보고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제 새끼를 잡아먹는 북극곰을 보고 사람들은 자못 혼란스러워진다. 그것이 설사 지구온난화 때문에 먹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지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정해진 자리가 있다. 우리말에 ‘~답다’라는 말이 있다. 예컨대, ‘인간답다’, ‘선생님답다’, ‘학생답다’, ‘부모답다’ 등이다. 이처럼 ‘~답다’는 말은 어떤 존재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이같이 쓰기는 쉽지만 그 말과 일치하는 삶을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자연은 그것대로 지켜져야 할 질서가 있고 인간은 인간대로 지켜야할 질서, 즉 순리가 있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인간의 질서마저 뒤죽박죽이 되면서 이변이 생기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모든 사물은 자신답지 못할 때 추하다. 세상 만물은 자기 존재위치가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자기 위치를 잃은 모든 것들은 추하기 마련이다. 밥이 밥그릇에 담겨 있을 때는 음식이지만 쓰레기통 속에 들어가면 쓰레기일 따름이다. 밥알은 밥그릇 속에 있을 때에 가장 먹음직스럽다.
모든 사물은 제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답다. 귤은 회수를 건너지 않았을 때만이 제 맛을 간직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회수를 건넌다면 한낱 보잘 것 없는 탱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자기 직분을 잊지 않아야 추하지 않다. 오늘 이 시점에 우리가 처한 혼란과 갈등의 먼 원인은 바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 때문이다.
정치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이다. 바로 저 유명한 언명,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다. 물론 이 말은 정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전반, 세계질서, 나아가 자연과 우주의 이해에도 통용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공무원은 공무원다우면 된다. 아비는 아비 노릇을 해야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어보자. 과연 그런지. 지금 이 시점에 과연 도지사가 도지사다운가? 시장이 시장다운가? 군수가 군수다운가?
/이강록 기자(<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