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자꾸 흘러가는데
신정일의 '길 위에서'
세상의 일이란 계획하거나 약속해서 꼭 될 일이 아니다.
“아아, 인생 백년(百年), 질병이 몸을 파고 들고 근심이 마음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옛 사람이 한바탕 크게 웃는 것도 만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일년에 좋은 밤 밝은 달을 그 몇 번이나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름난 땅과 빼어난 경치는 절로 신선의 인연이 없는 자라면 쉽게 만날 수가 없는 법이다.
우리들이 도고산에서 달빛을 완상한 모임은 실로 하늘이 베풀어준 것이요. 계획하거나 약속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무상하고, 사람의 일이란 쉬 바뀌는 법인지라, 빼어난 일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면, 문자를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이 산수 간에서 시(詩)와 술(酒)로 유람한 것이 아무리 일시에 떠들썩할지라도, 먹과 붓으로 그려내지 않는다면, 시일이 경과하고 세상 일이 바뀌고 나면 마치 지나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처럼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이 승방에서 하룻밤 나눈 이야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인멸되고 말 것이니,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 이 때문에 부득불 글을 지어 기록하게 된 것이다. 절에 다녀온 이튿날 사촌거사가 쓴다.“
이산해의 '달빛에 찾은 운주사(月夜訪雲住寺記)'라는 글이다. 운주사는 화순에 있는 천불천탑이 있는 절이 아니고 도고온천에서 예산 대술 남쪽에 있던 절이다. 사라지고 없던 절을 6. 25 전쟁 후에 다시 중창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잠을 자기 전 좋은 글의 소재나, 기억들이 떠올라 ‘새벽에 일어나 정리 해야겠다’ 생각한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잠 속에 빠져 있었을 뿐인데 그 때의 기억은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한 줄도 떠오르지 않아 허망할 때가 너무 많다.
그 때가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일들이나 사람의 만남 또는 글의 소재도 마찬가지리라. 세월은 자꾸 가는데, 흐르다가 사라지는 구름처럼, 흘러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맑은 정신의 나날들은 자꾸 사라져 가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정신 바짝 차리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살자고 하면서도 가끔은 세월을 허송할 때가 많다.
“내 청춘의 웅크린 세월동안 햇빛 속에서 내 잎과 꽃들을 흔들었네.
이제 나는 자신 속으로 시들지도 모르리.“
예이츠의 시 몇 소절이 나를 긴장시키는 새벽이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