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만든 공수처, 더 이상 흔들지 말라
김명성의 '이슈 체크'
공수처의 존폐 논란이 일고 있다. 언론이 앞장서는 모양새다. 정치권은 군불을 땐다. 정치권의 한 쪽은 화끈하지 못하다고 탓한다. 다른 한쪽은 금방이라도 폐지할 기세다. 언론은 섣부르고 여야 정치권 모두 오만한 자세다. 공수처는 국민의 염원 속에서 출발했다. 국민을 우롱하는 권력기관을 막기 위한 장치다.
국민 위에 군림한 기관이 바로 검찰이다. 그들은 고시 출신자와 그들을 떠받드는 수사관을 합해 만여 명으로 단단히 뭉친 조직이다. 중앙에서는 국정을 희롱하고 지역에서는 토착비리의 온상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지금 공수처를 흔드는 짓은 공수처 폐지를 노리는 자들의 계획된 행동이다.
구습에 찌든 일제 경찰, 군부로 권력 이동
대한민국 경찰의 역사는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의 일본 경찰을 고스란히 이어 받는 데에서 시작된다. 해방 직후 경찰조직의 최대 과제도 경찰의 민주화였다. 즉결처분의 폐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결처분은 사법절차를 무시한 채 경찰이 멋대로 판단해 처분하는 것이다. 일제 경찰 아래 우리민족은 사소한 이유로 무고하게 죽어갔다. 즉결처분은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다. 판사가 주재하는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고만장한 경찰 권력은 4·19혁명과 함께 몰락한다. 경찰은 3·15마산의거 당시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7명의 사망자를 내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다. 4·19혁명 당시에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85명을 사망케 했다.
경찰 권력의 침몰은 군부독재로 이어진다. 부패와 구악 일소를 명분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그들은 4·19혁명으로 꽃피운 민주화 열기를 여덟달 만에 짓눌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조직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군정에 돌입했다.
군부 권력, 반공 이데올로기로 국민 겁박
박정희가 이끈 군부 권력은 남북대치 상황을 십분 활용해 매우 빠르게 정권이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갔다. 그리고 반공법을 공포하고 소급 입법 방식으로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인사들까지 체포·구속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이다.
그들은 거리의 시위마저도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는 무지막지한 집단이다. 박정희가 한가하게 연회를 즐기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어간 10,26 당일, 차지철의 발언은 진담이다. 박정희가 결정하면 그만였다.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박정희)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 죽었는데 우리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별 문제 있겠습니까? 제가 탱크로 싹 밀어버리겠습니다”(차지철 경호실장)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유신정권 퇴진, 정치탄압 중지, 학원 민주화가 당시 시위대의 요구다. 부산 동아대에서도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고 부상 학생들이 늘어났다. 시민들도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수 만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 시위는 이미 시민항쟁으로 변해갔다.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모두 군인을 동원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런데 총 한방에 상황은 끝났다. 거사의 주인공 김재규는 군부권력의 만행을 막았기에 열사로 평가받아야 한다.
문민정부의 ‘하나회’ 척결, 공안 검찰권력 급부상
‘하나회’는 대한민국 군부 내의 사조직이다. 이름도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졌다. 청년 장교를 자처한 그들은 장교들이 권력을 거머쥔 외국사례까지 샅샅이 뒤지며 군대 내 사조직의 명분을 쌓아갔다. 박정희도 적극 두둔했다. 그들은 원칙을 지켰다. 박정희를 하늘같이 떠받들고 군대의 주요보직 승계는 하나회끼리 이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회도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 출신 대통령의 퇴장 뒤로 급격히 힘을 잃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척결은 힘겹게 버티고 있던 군부권력에 명줄을 끊었다. 척결방식은 옷을 벗기는 예편이다. 군부가 평범한 공직자로 제 모습을 되찾아갈 때, 통치권자가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권력기관이 바로 검찰이다.
해방 후 1948년 검찰청법이 만들어졌다. 수사와 공소 제기로 권력의 기초를 다진 검찰은 ‘빨갱이 제조’에 기술을 발휘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분단시대에서는 ‘생각’만으로도 범죄가 성립된다. 어떤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사회, 얼마나 야만적인가. ‘찬양·고무·선동’이나 ‘이적표현물’이라는 개념은 불명확하다.
검사의 판단에 죄의 유무가 갈린다. 검사들은 법 기술을 발휘해 정권에 충성했다. 실체 없는 이념을 제멋대로 재단하며 출세가도를 달린 자들이 간첩 잡는다는 공안검사다. 공안검사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다 탄핵으로 무너진 게 박근혜 정권이다.
돈과 권력에 눈독 들인 특수 검찰권력
검사 윤석열의 부상은 특수부의 권력 장악 과정과 대체로 일치한다. 서울지검 특수부는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지시한 사건, 정치인 비리, 정치인, 대형 경제사범을 다룬다. 수사 인력도 넉넉하고 수사역량도 인정받는다. 여러 기관들로부터 파견 형식으로 지원사격도 받기 때문에 파워가 막강하다. 자체적으로 감청시설도 보유하고 있다.
재벌들이 연루된 대형 경제사건이 많기 때문에 돈도 몰린다. 퇴직 후 돈 되는 사건을 수임할 기회가 보장돼 호화스럽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자리다. 특수부가 개입된 사건마다 호화 향응에 돈 잡음도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달콤한 권력 맛에 취해 검찰개혁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검찰개혁 목소리가 높은 정권 전반기에는 과거 정권 비리를 수사해 신임을 얻고 정권 후반기에는 현 정권에 비수를 꽂았다. 야당의 지지를 얻으며 검찰 개혁을 피하는 교묘한 수법이다. 그렇게 생존해온 검찰 특수부는 검사 윤석열을 오늘날 대통령 후보로 등극시킨 배경이 됐다. 과거 경찰이 누린 권력을 군부가 이어받고 이를 다시 검찰이 몽땅 이어받은 셈이다.
정권이 만든 권력기관, 국민이 만든 공수처
공수처 설치 논의는 국민의 목소리를 담은 시민단체의 청원에서 시작됐다. 1996년의 일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야당의 반대가 드셌다. 겉으로는 야당이지만 실제 떨떠름한 자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
지난해 출범한 공수처의 수사대상은 7천여 명에 달한다. 모두 고위공직자들이며 무소불위의 검사와 판사도 수사대상이다. 기득권이 누려온 성역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가장 저항이 큰 조직이 검찰이다. 기소독점권이 무너지게 됐기 때문이다.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검찰 자신들도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검찰은 권력의 핵심이다. 대통령을 감옥에 넣을 수 있고 얼마든지 모욕을 주며 권력을 만끽할 수 있다.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수사도 그들에게는 영웅담이 된다. 그러기에 새로 출범한 공수처장에게도 수사의 칼날을 겨누며 길들이기 한다. 공수처를 진보정권의 검찰 장악 시도로 보는 수구 언론들도 공수처 무용론을 부르짖는다. 대선 결과에 따라 폐지를 예측한다. 당장 공수처장 사퇴 여론에 군불을 때기도 한다. 기득권의 이해관계는 서로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공수처는 권력기관의 종착지다. 떠받치는 힘은 국민이다. 최근의 고발사주도 하나씩 밝혀내고 있다. 검찰이 수사했다면 무혐의 종결은 불 보듯 하다. 그들은 결코 무능하지 않다. 선거정국이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검찰의 조직적인 저항은 공수처의 맷집을 키울 것이다.
공수처는 국민의 기대 속에 몸집도 키워갈 것이다. 가장 힘이 세다는 검사들이 하나 둘 포승줄에 묶여 고개 숙이고 구치소로 향할 때 국민은 환호할 것이다. 반대로 기득권 세력은 몸서리칠 것이다. 성경 구절처럼 공수처,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김명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