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헌 앵커 정치인 변신...'폴리널리스트와 언론인 윤리' 다시 논란
미디어 이슈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변하는 순간 ‘폴리널리스트(polinalist: politics+journalist)’라는 칭호가 붙는다. 비록 정치인이 되지 않았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위상을 이용해 정·관계 진출을 시도하는 언론인들까지 가리켜 폴리널리스트로 규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선·지선 앞두고 넘쳐나는 폴리널리스트...비판·논란 다시 가열
정치인을 꿈꾸는 언론인들, 즉 잠재적 폴리널리스트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많다. 특히 최근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현직 언론인들이 다시 정치판에 잇따라 호출되고 있다.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 정치에서도 호출과 이동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직속 공보단으로 자리를 옮긴 이정헌 전 JTBC 앵커와 안귀령 전 YTN 앵커가 폴리널리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언론 비평 매체와 기자협회, 심지어 같은 언론사 동료들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다.
JTBC 아침 뉴스 앵커를 맡아 진행해 왔던 이 전 앵커와 YTN ‘뉴스가 있는 저녁’을 진행한 안 전 앵커가 동시에 더불어민주당 선대위에 합류함으로써 두 사람이 직격탄을 맞는 모양새다. 특히 두 앵커는 지난 7일까지 뉴스 앵커석에 앉았다가 갑자기 선대위 직행 소식에 YTN 노조와 중앙일보·JTBC 노조는 즉각 비판 성명을 내는 등 거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전북 출신 이정헌 JTBC 전 앵커 민주당 대선 후보 공보단으로...비난 성명, 왜?
이들 가운데 이 전 앵커는 1994년 광주MBC 기자를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11년 JTV전주방송 창간 멤버로 기자와 앵커, 시사정보팀장, 보도팀장을 두루 거친 전북 출신의 중견 언론인 출신이란 점에서 그의 정치 행보에 전북도민들의 관심이 뜨겁다.
게다가 그는 2011년부터 JTBC 기자로 자리를 옮겨 사회1부 차장과 주말 저녁 뉴스 및 평일 이브닝 뉴스 앵커를 맡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JTBC 도쿄 특파원과 JTBC 보도국 뉴스제작2부장을 거쳐 최근에는 아침 뉴스 앵커로 맹활약해 오던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기까지 많은 유혹과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더불어민주당 사고 지역인 전주을 보궐선거에 후보자로 나설 것이란 얘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역에 나돌았다. 전북지역 언론계와 정치권에서는 그의 정치 입문설이 이상직 국회의원(무소속)의 탈당과 구속 과정에서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마침 18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직속 공보단 대변인 겸 미디어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에 기대보다는 실망과 우려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직속 국가인재위원회는 이날 "안귀령 YTN 앵커와 이정헌 JTBC 앵커를 영입했다"고 전격 밝혔다. 두 사람은 공보단 대변인으로 참여하며 이 전 앵커는 선대위 미디어센터장으로, 안 앵커는 부센터장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정치인 이정헌, 부끄러운 이름에 유감을 표한다" 비판
그러나 이날 이 전 앵커가 퇴사 직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직행한데 대해 중앙일보와 JTBC 기자들은 강한 유감을 표했다. 특히 중앙일보·JTBC 노동조합(위원장 최재원)과 한국기자협회 JTBC지회(지회장 이지혜)는 ‘정치인 이정헌, 부끄러운 이름에 유감을 표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 전 앵커의 정치권행을 비판했다.
중앙일보·JTBC 노조와 기자협회 JTBC지회는 “이 전 기자가 지난주 낸 사표는 아직 잉크조차 마르지 않았다"며 "불과 열하루 전인 7일까지 누구보다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어야 할 앵커의 자리에서 아침 뉴스를 진행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여야 대선 후보의 소식을 전했고 직접 앵커 멘트도 고쳤다"면서 "사표가 수리되자마자 곧바로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탈을 바꿔 쓰고 특정 후보 캠프로 직행했다. 대선이 겨우 50일 남은 시점”이라고 힐난했다.
JTBC 노조 "정치권 입문, 개탄을 금치 못하며 선배라는 호칭 거부한다”
중앙일보·JTBC 노조는 이에 덧붙여 “언론인으로서의 양심과 윤리를 내버리고 권력을 쫓는 모습에서 ‘신뢰’는 무너졌다"며 "JTBC라는 이름을 사적 이익을 위한 포장지처럼 쓰는 모습에서 ‘언론인’이란 호칭 역시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꼬집었다.
노조는 또한 “피와 땀으로 일궈온 신뢰의 이름을 정치권 입문을 도와줄 ‘티켓’처럼 여기는 모습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며 "우리는 이 전 기자에 대해 ‘선배’라는 호칭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기자가 재판을 받고 있는 민주당 이상직 의원의 지역구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이재명 후보 캠프에 뛰어들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며 “우리는 ‘정치인 이정헌’을 끝까지 감시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노조는 특히 “언론인으로서의 양심과 윤리를 내버리고 권력을 좇는 모습에서 이미 그 신뢰는 무너졌다. JTBC라는 이름을 사적 이익을 위한 포장지처럼 쓰는 모습에서 언론인이란 호칭 역시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이상직 의원 의혹 집중 보도, 이스타항공 사태 본질 추적...해당 지역구 출마설이라니?”
노조는 이 외에도 “정치권에선 그가 지역구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특정 후보 캠프에 뛰어들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는데, 그 곳은 재판을 받고 있는 이상직 의원의 지역구”라며 “모두가 아는 것처럼 JTBC는 ‘이 의원 일가의 편법 증여와 조세 포탈 의혹’ 연속 보도를 통해 이 의원의 여러 의혹을 집중 보도하고 이스타항공 대규모 해직 사태의 본질을 추적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이 의원과 관련된 보도는 오로지 성역 없는 권력 감시를 위해 기자들이 발로 뛴 결과물”이라며 “소문조차 구성원들의 노력에 대한 모멸"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앵커와 함께 안귀령 전 YTN 앵커 역시 퇴사 직후 민주당 선대위에 합류한 상황이다. 지난 7일까지 YTN ‘뉴스가 있는 저녁’을 진행한 안 앵커는 지난 10일 퇴사했다.
안 앵커의 이재명 선대위 합류 소식에 YTN 노조도 이날 성명을 내어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방송의 사회적 책무를 하루아침에 저버린 것이고 공정방송을 위해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옛 동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전국언론노조 YTN 지부는 “당분간 쉬고 싶다면서 앵커 자리에서 내려온 지 불과 열흘 만의 캠프 직행"이라고 지적한 뒤 "젊고, 경험이 적고, 비정규직 앵커 출신이라는 안귀령 씨의 조건이 정치적 행보까지 정당화할 수 없다”면서 “그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내놨던 앵커리포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기 부정”이라고 꼬집었다.
YTN 노조는 더불어민주당에도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YTN 노조는 “언론이 자신들만 탓한다며 입만 열면 ‘기울어진 운동장’ 운운하더니 뒤에선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를 접촉해 캠프에 합류시킨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치 행위인지 자문해보라”며 “안귀령 씨와 민주당 양쪽에 이번 결정에 대한 철회와 사과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이정헌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지 지켜봐주면 좋겠다"
이날 오전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겸 이재명 후보 상임중앙선대위원장이 '방송언론 국가인재 발표식'에서 두 앵커 출신의 선대위 대변인 영입 사실을 밝히고 소개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입장을 언론에 설명했다.
먼저 이 전 앵커는 “기자 여러분께서 우려하시는 점, 저희가 잘 알고 있다”며 “저도 역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안귀령 앵커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고민의 깊이가 매우 깊었다”며 “우려하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앞으로 어떻게 정치 영역에서 바르고 올바른 소식을 전하고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지 지켜봐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제가 28년, 30년 가까이 방송하면서 항상 모든 말과 글의 중심에는 팩트가 있었다”며 “팩트를 왜곡하거나 한 쪽에 치우치는 가치를 가지고 기사를 쓰거나 방송한 적 없다. 그 부분을 여러분도 아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팩트를 중심으로 해서 이재명 후보, 더불어민주당의 진정성이 국민에게 잘 전달되도록 노력할테니 지켜봐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어 안 앵커도 “저는 단 한번도 뉴스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개인적 목적을 가진 적이 없었다”며 “대부분 뉴스가 그렇듯 저희도 회의를 거쳤고 많은 구성원들의, 팀의 논의와 토론을 거쳐서 아이템 선정했기 때문에 개인적 성향이 제가 있더라도 뉴스에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들의 민주당 영입에 대해 정치권의 논란도 가열되는 분위기다.
정치권 "내로남불" 주장...폴리널리스트 역대 정권마다 논란
이날 정치권에선 “박근혜 정부 때 민경욱 전 국회의원이 KBS 부장으로 있다가 곧바로 청와대 대변인으로 직행했을 때 격렬하게 비판했는데, 그런 것에 비춰봤을 때 현직 앵커가 대선 후보 대변인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 심한 내로남불 아니냐”란 따가운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언론인 출신인 윤창중 씨를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했던 박근혜 초기 정부는 대변인의 성추문으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지만 이어 2015년 10월 청와대 새 대변인에 MBC ‘100분 토론’ 진행자였던 정연국 전 시사제작국장을 임명함으로써 폴리널리스트 논란은 거셌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폴리널리스트 논란은 더욱 고조됐다. 특히 '프레스 프렌들리'로 유명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엔 언론인이 어느 날 갑자기 권력 옆으로 이동하거나 낙하산으로 고위직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러한 폴리널리스트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민주국가에서 언론인들의 정치 참여를 봉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른바 '이해 충돌'을 막기 위해 퇴직 공무원의 특정 분야 취업을 일정 기간 동안 제한하는 '공직자윤리법' 등을 감안한다면 언론사도 이에 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 때문에 늘 제기돼 왔다.
다시 생각하고 성찰하게 한 '언론인 윤리'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김세은 전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그동안 우리는 성공한 폴리널리스트만 거론하고 주목했지만, 더 위험한 건 실패한 폴리널리스트와 언론사 내의 잠재적 폴리널리스트”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가뜩이나 언론의 신뢰 저하로 인한 자긍심의 박약한 지역에서 이러한 잠재적 폴리널리스틀이 더 많이 상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최근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지역 정치인들은 ‘언론인 찾기’에 혈안인 형국이다.
이 때문에 지방선거에 나설 예비 후보 캠프로 이미 자리를 옮긴 지역 언론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들에게 이정헌 전 앵커와 같은 자리는 '그림의 떡' 또는 '꿈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언론인의 윤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성찰하게 한 이번 사건이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