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로 가득한 세상-15세기 조선 풍경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2-01-14     백승종 객원기자

나는 세종 시대를 출발점으로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적 전환’이 본격화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때부터 세상은 사서삼경에 명시된 유교적 질서에 따라 재편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선산 김씨(대문장가 서거정의 아내)의 시대는 조선 후기처럼 남편이 집안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풍토가 아니었다. 그때는 아직도 공처가가 흔한 세상이었다.

서거정이 남긴 재미난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그 이야기를 나는 권별이 저술한 <<해동잡록>>(권4)에 수록된 <서거정(徐居正)>에서 읽었다. 아내 선산 김씨에게 서거정이 쩔쩔매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실은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산 김씨의 남편이 묘사한 동시대의 사회상은 다음과 같았다.

그때 대장 한 사람이 있었는데 소문난 공처가였다. 그가 하루는 벌판에 빨강 깃발과 파랑 깃발을 하나씩 꽂아놓고 엄숙히 명령하였다.

“공처가는 빨강 깃발 아래 집합하고, 공처가 아닌 사람은 파랑 깃발 아래로 모여라.” 모든 병사가 빨강 쪽으로 갔다. 파랑 깃발 아래는 겨우 한 사람이 보였다.대장은 파랑 깃발 아래 선 그이를 칭찬하였다.

“나로 말하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적과 대적하여 몽땅 무찌른 사람이다.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져도 기가 꺾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만 들어가면 도리를 팽개치고 애정에 못 이겨 아내에게 진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내를 무서워하지 않는가?”

그 사람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제 아내가 타이르기를, 세 남자만 모여도 여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테니 당신은 그런 곳에 가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빨강 깃발 아래 저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제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는 대장이 몹시 기뻐하며 중얼거렸다. “공처가가 이 늙은이 한 사람만은 아니로구나.” 부부가 오순도순 알콩달콩하며 이따금 티격태격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고려 시대만 해도 다들 그렇게 살았다. 권씨 부인과 목은 이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15세기의 조선은 달라지고 있었다. 세상이 성리학적 윤리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주의자 서거정은 인위적인 사회변화에 반항하였다. 아내 선산 김씨는 이런 남편을 더욱더 깊이 사랑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사랑하는 문장가 남편에게 시도 때도 없이 지청구를 할 수 있었으니 꽤 행복한 삶이었겠다.

              백승종 저, '조선, 아내 열전'(시대의창, 2022) 

"상감마마 첩은 억울하옵니다!" - 문명론자 세종 vs. 재혼한 김씨부인

조선 건국 이후 급진적인 성리학자들이 조정에 대거 등장하여, 재혼한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았다. 김씨 부인에 관한 악랄한 소문이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마구 거론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조정에서는 미확인된 소문을 근거로 여성들에게 벌을 주기도 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종과 일부 진보적인 성리학자들은 고려 사회의 유습을 완전히 뜯어고치려고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김씨 부인이 이지와 재혼하기 직전에 벌어진 낯 뜨거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밤중에 이지가 김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러자 부인의 아들 조명초가 이지의 목덜미를 붙들고 땅바닥을 구르며 목놓아 슬피 울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김씨의 재혼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지와 김씨는 재혼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함께 보낸 다음, 김씨는 어떤 사람에게 신랑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나는 이분이 늙었는가 하였더니 실은 젊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록》 태종 15년 11월 1일)

그 당시 김씨의 나이는 57세, 이지는 70도 훨씬 지났다.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이런 이야기를 《실록》에까지 자세히 옮겨 적으며, 사관들은 김씨 부인을 음탕한 여성이라고 공격하였다. 그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실록》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훨씬 심한 소문도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역시 악성 소문일 뿐 수사를 통해서 확인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매우 참혹하다. 김씨의 첫 번째 남편 조화가 장모와 간통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김씨는 화풀이로 자기 역시 허해라는 고위관리와 간통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우연한 실수가 겹치는 바람에 남편 조화가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되었단다. 그가 김씨를 꾸짖자, 김씨는 대꾸하기를 ‘당신 행실이 이미 그릇되었는데 어떻게 나를 비판하는가’라고 당당한 자세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록》의 편찬자는 김씨의 부도덕함을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심지어 김씨가 집안의 종과도 간통하였다고 썼다. 이 역시 악의적인 소문일 뿐 증거가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인간 사회에는 크고 작은 일탈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거나 재산상 피해를 가져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대개는 당사자의 명예가 실추되는 데서 그럭저럭 마무리된다.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 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대가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왕은 문자 그대로 성리학적 도덕을 실천하라고 신하들에게 강요하였다. 특히 여성의 성적 문란을 엄하게 다스렸다.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자 영의정까지 지낸 이지의 후처 김씨 부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세종 9년 9월 27일, 왕은 김씨를 심악(경기 파주)에 있는 농막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김씨 부인은 억울했을 것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성적 자유를 구가한 남녀가 많았는데 하필 자기에게만 음란한 여성이라는 죄명을 씌워 망신을 주고 벌까지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종에게는 당연히 이러한 조치를 변호하고도 남을 큰 명분이 있었다. 왕은 중국의 고전 시대를 조선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신분을 막론한 누구나 충과 효와 열의 가치를 실천하는 모범적인 문명국가 조선을 만드는 것이 왕의 꿈이었다. 세종 때 벌어진 김씨 부인 사건은 아내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누구의 아내라도 처신이 흐릿하면 음란하다는 죄명으로 처벌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출처: 백승종, <<조선, 아내 열전>>(시대의창, 2022)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