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아갈수록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2-01-07     신정일 객원기자

춘추전국시대 말엽의 일이다. 문장이 뛰어났던 송옥(宋玉)은 굴원(屈原)과 더불어 대표적인 남방시인이었다. 그러나 송옥의 문장은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송옥의 글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초왕(楚王)이 어느 날 송옥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사람들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대의 문장을 따르는 사람이 없소?”

초왕의 말의 뜻을 알아차린 송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떤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쉬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여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조금 수준이 있는 노래를 부르자, 그를 따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적어졌습니다. 다시 더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불과 십여 명만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 아주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두 세 명만이 따라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황은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구름 위까지 오르는데, 동네 울타리를 날아다니는 참새가 어찌 하늘의 높음을 알겠으며,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가 어항 속의 작은 물고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새 가운데만 봉황이 있고, 물고기 중에만 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비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초나라왕은 그의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다. ‘곡(曲)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으로 <곡고화과(曲高和寡)>라는 고사 성어와 관련해 전해온 얘기다. <국민가수>나 <싱어게인2>등 노래 경연대회를 봐도 그렇다. 진정성을 가지고 노래를 선곡해서 소신껏 부르면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고, 뭔가 튀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어찌 음악만 그러할까?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러하다. 어려운 책이나, 노래나 누가 따라 부르고 읽겠는가? 어쩌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씩이 있고, 또 몰라준대도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지 않은가?

“나는 나의 주위에 둘레를 치고 성스러운 한계를 그어 놓았다. 산들이 높아질수록 나와 더불어 오르는 사람은 더욱 적어진다.“

살아갈수록 사람들을 만나며 사는 것이 어렵다. 누군가를 설득하여 이해시키는 것도, 누군가와 함께 길을 가는 것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가만히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기도 어렵고, 그렇게 많이 걸었던 길도 세월이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눈 감고도 걸어가던 그 길, 그 길 조차도 버거워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 하지만 지금도 걸어가야 하는 것은 길이 내게는 주어진 운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이 인간의 영혼에서 사라졌다”고 말한 밀란 쿤데라의 말이 귓전에 쟁쟁 울리는데도 걸어야 하는 거, 그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 아닐까? 점점 사위어 가는 나뭇잎, 언제까지 저렇게 아름다울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